”땅에게 말해 보아라. 그것이 네게 가르쳐 줄 것이다”
대홍수의 증거 (상)
조웅진
1. 일반 계시의 불충분성
(바른 성경) 욥 12:8,9
8 ··· 땅에게 말해 보아라. 그것이 네게 가르쳐 줄 것이다. 바다의 물고기도 네게 설명해 줄 것이다.
9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셨음을 이 모든 것들 중에 알지 못하겠느냐?”
고난받는 욥을 찾아온 친구 중 소발은 욥에게 “네가 그만큼 커다란 죄악을 저질렀기에 이런 수모를 당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욥의 고난을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하여 나름대로 자기주장을 논증하기도 했다(욥 11:6~11). 그러나 그의 주장은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일반적인 원리만 지나치게 앞세운 상당히 짧은 생각이었다.
이에 대해 욥은 “그런 당연한 것을 누가 모르겠느냐?”라고 하면서, 소발의 경솔한 진단에 대해 나름대로 반증하는 사례를 들기도 하고(욥 12:6, 23), 자기 결백함을 하나님께 호소하였다(욥 13:3). 한편, 논쟁 중간중간 진술된 구절에서, 우리는 그 당시 사람들이 피조물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반 계시’의 의미를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일반 계시란 무엇인가?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람들에게 스스로 나타내셨다고 선포하는데, 신학에서는 그러한 나타내심 또는 드러내심(revelation)을 ‘계시’라고 부른다. 또한, 이 계시는 ‘보편적인 방편’과 ‘특별한 방편’을 통해 전달되는 두 가지 종류의 계시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이중, 전자(前者)를 가리켜 일반 계시라고 부르며, 후자(後者)를 가리켜 특별 계시라고 부른다.
일반 계시도 좀 더 세분화하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1
첫째, 지금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을 가리켜 외적 일반 계시라고 부른다. 사람은 외적 일반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성경은,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계시가 있음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창 1:31; 민 14:21; 대상 16:26; 느 9:6; 시 19:1~2; 24:1~2; 104:24; 136:5~9; 사 45:18; 요 1:10; 행 14:17; 롬 1:20~21; 2:15; 5:12~13; 딤전 4:4; 6:7). 심지어 ‘하나님이 없다’는 자들을 어리석다고 한다(시 14:1~4).
둘째, 인간의 이성이나 경건한 감정, 종교적 직관, 도덕적 의식 등과 같은 인간의 내적인 기능을 가리켜 내적 일반 계시라고 부른다.
필자는 이 글에서 외적 일반 계시, 즉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피조물들을 다룰 것이다.
일반 계시는 참으로 많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특별히 영원 전부터 만유의 주요, 상속자로 세우심을 입은 그리스도의 속성과 성품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따라서 사람이 만일 범죄하지 않았다면, 누구나 일반 계시가 가르쳐주는 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충분하게 깨닫고 이해했을 것이다. 그 결과, 모두가 하나님을 알자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찾고, 기꺼이 그분의 말씀을 모든 지식과 지혜의 절대 기준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한 뒤로, 사람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찾고 그분에게 묻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묻고 스스로 답을 얻는다. 죄로 부패한 사람의 마음이 일반 계시가 가리키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에 기꺼이 자기 자신을 앉혀놓는 것이다. 그로 인해, 모든 지식과 지혜의 기준은 사람이 되며, 일반 계시의 원래 뜻은 전부 왜곡되어 자의적으로 해석된다.
물론, 그런 사람 중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일반 계시의 내용을 왜곡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들이 일반 계시에 나타난 신성의 충만한 영광을 깨달아 알게 되어, 참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마음에서 그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순전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패한 마음이 추구하는 자기 유익과 영광이 성립되기 힘들 것 같아 마지못해 그리한다. 그래서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의 유익과 영광을 떠받드는 ‘힘 좋은 하인’이나 ‘비인격적인 힘’에 불과하다. 그들의 하나님은 온 세상 만물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전혀 아닌 것이다. 이렇듯 그들조차도 겉으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듯하나, 속으로는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맹렬하게 부인하며 대적하고 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일반 계시가 분명하게 증거하는 ‘그 하나님’, 즉 주 예수 그리스도만 아니면 된다.
이렇듯, 사람은 완벽하게 죄의 노예인 상태로 태어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을 맹렬하게 거절하고 대적한다. 따라서 누군가 ‘일반 계시’만으로 무언가 논하려고 한다면, 아무리 애쓴다 해도 그 결말은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이라는 ‘어리석음’으로 귀결될 뿐이다. 타락한 인간 쪽에는 일말의 희망조차 남아있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조금의 기대도 걸지 않으시기에, 사람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아예 없는 것으로 여기신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도 그들을 가엾게 여겨주셨다. 친히 사람들을 택하셔서, 그들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래의 의미대로 세상에 전하게 하셨다. 그것이 바로 특별 계시이며, 그 특별 계시는 성경에 충분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성경, 또는 특별 계시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사역에 관하여 명제적이고 역사적으로 선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이 전적으로 무능력하며,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사람을 당신 홀로 은혜로 구원해내시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 특별 계시를 따라 역사하시는 성령의 조명 하심을 통해, 비로소 자기 어리석음과 허물이 자기 눈을 가려 그리스도를 찾지 못하게 했다는 총체적인 진실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분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 앞에 깊이 뉘우쳐 회개함으로써, 생애 처음으로 일반 계시를 그 의미 그대로 해석할 수 있는 토대를 갖게 된다.
이제 그는 열심히 그리스도를 찾고, 기쁨으로 그분의 말씀을 모든 지식과 지혜의 터전으로 삼는다. 교만한 죄인들이 자기를 의뢰하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도둑질하는 법을 스스로 깨우쳐갈 때, 그는 겸손하게 주님 발 앞에 엎드려 그리스도의 말씀을 새겨듣고, 오직 그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찬송하는 법을 배워나간다.
따라서 사람이 일반 계시의 의미를 진정 올바르게 해석하려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마음에 깊이 묵상하며, 성경이 선포해주는 사실을 그대로 일반 계시에 적용하면서 해석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에게 진실을 알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짙은 안개로 뒤덮인 죄의 길에서, 오류라는 심연의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다른 이의 처절한 비명을 들으면서도 손으로 더듬으며 기어이 앞으로 나가려는 것과 같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도 코끼리의 총체적인 존재를 파악해낼 수 없다. 누군가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의 총제적인 진실을 파악하려면, ‘반드시’ 성경을 먼저 참조하여 영적인 눈을 떠야 한다. 그렇게 한다 해도 우리의 남아있는 죄와 자연적인 한계는 종종 우리를 길을 잃고 헤매게 한다. 그래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곤 한다.2
자,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하여 탄생한 어두운 진화론적인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신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너무도 밝게 빛나는 구속 역사다. 여러분은 둘 중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답은 쉬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바라보아야 비로소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조명을 받아, 세상이 인간의 죄로 인해 오염되어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온전하게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하나님의 영적 피조물인 인간과 그 외의 다른 피조물인 우주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가 죄로 인해 계속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직 성경의 첫 권(창세기)만이 그와 같은 진실을 명확하게 설명해준다(창 3:17~18; 4:11; 5:29; 7:4, 21~22; 9:11).
한편 우리는, 피조물을 성경의 조명에 비추어 바라보면 우리의 경험과 놀라운 정도로 잘 맞는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물론, 어떤 것에 대한 설명이 경험과 잘 맞는다고 해서, 그 설명이 진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가 진정 신적 진리라면, 우리의 경험과 합리성과 괴리될 수 없다는 사실은 사실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것을 좀 더 분명하게 이야기하면, 우리는 경험과 합리성이 갖는 가치의 토대와 근거 역시도 성경의 조명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사적으로 발견하고 확신하기 때문에, 진리와 그 진리에 의존하는 경험 사이에 근본적인 모순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그런 사실을 실제로 확인해가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감탄하고 즐거워하며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게 된다.3
그러므로 이 글의 제목이 ‘땅에게 말해 보아라’니, 땅만 살펴보겠다는 말이 아니다. 오직 진리의 성경을 참조하여 땅을 바라보려고 할 때만 더 진실하게 실제 세상을 해석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배제한 뒤에, 인간의 어두운 이성에 근거한 탈출구도 없는 헛된 철학으로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시도는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헛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2. 특별 계시에 나타난 대격변이 기록된 땅
2-1. 노아 홍수 사건은 광범위하고도 격렬한 대격변이었다
타락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주와 인간 사이의 조화에 커다란 요동이 일어나는 사건이 다시 발생하였다. 바로 노아 시대에 일어난 대홍수(Genesis Flood)다. 노아의 홍수는, 범위의 측면으로는 전 지구적인 광범위한 격변이었고(창 7:19~23; 8:8), 정도(level)의 측면으로는 엄청난 혼란과 파괴로 가득한 두려운 사건(창 9:11)이었다.
사실, 대홍수는 단순히 많은 비(rain)와 관련 있는 현상이기보다, 땅(earth)과 깊은 관련이 있는 현상이었다(창 6:13; 7:11; 8:21; 9:11). 특히, 창세기에서 이러한 대격변 현상을 가리켜 ‘맙불(mab-buwl)’이라는 한 가지 단어만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우리가 흔하게 볼 수 있는 ‘홍수’나 ‘강의 범람’을 가리키지 않는다. 성경에서 ‘넘치다’ 또는 ‘홍수’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쉐테프(Sheteph, 욥 38:25; 잠 27:4; 사 54:8; 단 9:26, 11:22; 나 1:8)나 나우하울(naw-hawr, stream 또는 river의 의미) 등이 있지만, 노아 홍수와 같은 대격변(catastrophe)에는 이 ‘맙불’을 사용한다. 이러한 ‘맙불’의 구별적 용례는, 노아 홍수가 일반적인 홍수∙범람 현상과는 확실하게 구분되는 아주 특별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시사한다.4
2-2. 대격변과 지층의 형성
노아 홍수가 그렇게 광범위하고도 격렬한 현상이었다면, 땅이 그 사건을 ‘기록’해놓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기록을 살펴보기 전에, 지층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먼저 알아보고, 지층 형성이 왜 대홍수로밖에 설명되지 않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2-2-A. 지층은, 토사가 옆으로 강하게 흐르면서 만들어진다
퇴적층이란, 원래 단단하지 않았던 퇴적물이 마치 시루떡처럼 평행한 층(層, layer)5을 이루며 켜켜이 쌓이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단단하게 굳어 암석으로 변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층은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적인 기반이라 할 수 있으며, 육지의 약 75% 이상이 이 퇴적층으로 덮여 있다.
이렇게 전 지구적으로 땅의 표면을 이루고 있는 퇴적층은 과연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여러분은 중∙고등학교 때, 지층이 어떻게 만들어진다고 배웠는가? 우리는 다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에 근거한 ‘지층 누중의 법칙(law of superposition)’을 배웠다. 동일과정설이란, “지질학적 변화는 과거나 현재나 같은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가설이다. 즉, 말 그대로, 지층은 항상 ‘동일한 과정’을 거치며 만들어진다는 의미다.
그리고 지층 누중의 법칙이란, “지층은 아래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이기 때문에, 위에 있는 층은 아래에 있던 층보다 항상 나중에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더하여, 지층과 지층 사이에는 꽤 큰 시간 차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이론은 ‘실험과 관찰’을 통해 확립된 ‘자연법칙’이 아니라, 순전히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진 ‘지질학적 사고(思考)실험’의 결과에 불과하다.
퇴적 현상과 지층 형성에 대한 실제적인 실험은 최근(몇 십 년 전)에 들어서야, 비로소 제대로 이루어졌다. 지질학자 베르톨(Berthault)은 프랑스 과학협회에서, 굵은 흙과 고운 흙이 섞여 있는 비커의 흙을 아래로 쏟아붓는 ‘자유낙하 실험’을 하였다. 그는 그 실험을 통해 지층이 짧은 시간에 형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6 아래의 동영상 3:36~4:56 부분을 꼭 참조하도록 하자.
<영상1> 자유낙하 실험7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가? 입자의 크기가 다양함에 따라 굴러가는 패턴도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굵은 입자는 굵은 입자끼리, 작은 입자는 작은 입자끼리 모이게 된다. 이렇게 흙들이 알갱이의 크기에 따라 헤쳐 모이는 현상을 지질학에서는 ‘분급(sorting)’이라고 한다.8
분급이 일어나는 정도는 입자의 크기와 분포 및 모난 정도, 밀도 차이 등에 따라 결정된다.9
2-2-B. 저탁류(底濁流, turbidity current)
이러한 분급 현상이 공기 중에서만 일어날까? 그렇지 않다. 물속에서도 일어난다. 이 현상이 물속에서 일어날 때 저탁류가 일어나며, 바로 이 저탁류를 통해 육지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지층이 만들어진다. 저탁류(<그림 4> 참조)란 호수나 강, 특히 해저 절벽에서 아래쪽으로(저, 底) 빠르게 흐르는 고밀도 퇴적물(탁, 濁)의 흐름(류, 流)을 의미한다. 영어의 ‘turbid’라는 단어 역시도 ‘탁하다’는 뜻으로써, 그만큼 여러 종류의 퇴적물이 많이 섞여 있다는 뜻이다.
저탁류에 의한 지층형성 이론도, 자유낙하 실험과 마찬가지로 실험적인 기반이 있다. 1994년, 콜로라도 주립 대학이 실시한 ‘불균일 모래 혼합물의 지층 형성에 관한 실험’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 실험은 퇴적학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성과를 거두었다.10 실험 방법은 커다란 물탱크에 다양한 크기의 입자들을 섞어 넣은 다음, 옆으로 길게 뻗은 수로를 따라 그 흙탕물을 흘려보내는 것이었다. 실험 결과는 당시 통념을 고려한다면, 실로 놀라웠다. 자유낙하 실험에서 살펴보았던 분급의 원리를 따라 지층이 형성된 것이었다. 아래의 동영상을 4:31~6:41 부분을 꼭 참고하도록 하자.
<영상2> 저탁류에 의한 지층 형성 실험11
이 실험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지층이 형성될 때 일자(ㅡ) 형태의 층이 아래에서부터 위로 차례차례(ㅡ ᆖ 三 순으로) 쌓이지 않고, 수직-수평 방향으로 동시에(↗) 쌓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지층이 다른 지층보다 아래에 있다고 해서, 그 지층이 위의 지층보다 반드시 오래된 지층은 아니다. 이를 그림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 5>와 <그림 6>은, 지층이 ‘왼쪽 아래에서부터(from left-downside)’ ‘오른쪽 위를 향해(to right-upside)’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특히, 이중 <그림 6>을 주목해보도록 하자. <그림 6>에서 t1과 t2는 각각 특정 시점을 의미하며, t1의 하얀 선 안쪽의 퇴적물과 t2의 하얀 선 안쪽의 퇴적물 중에 전자(前者)가 먼저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아래쪽 지층이라고 해서, 무조건 먼저 만들어지지 않는다.
만약 지층 누중의 법칙에 매몰된 어떤 사람이 와서 ‘t1의 위쪽’과 ‘t2의 아래쪽’에 손가락을 대고서, “어느 것이 먼저 만들어졌습니까?”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지층 누중의 신념(belief)을 따라 t2의 아래쪽이 더 먼저 만들어졌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t1의 위쪽이 더 먼저 만들어졌다고 할 것인가? 우리는 분명히 t1의 시점이 t2의 시점보다 더 이른 시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저들이 보기에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게도(?) t1의 위쪽을 합리적으로 선택할 것이다.
또한, 이 실험에서 확인된 사실은, 지층은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상당히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층의 형성 과정을 저탁류로 설명하려는 이론은, 오늘날 거의 모든 지질학자가 인정하고 있다.12 만약, 이 이론이 단순히 실험실에서 확인한 정도로 그쳤다면, 전 지구적으로 적용하기에는 여전히 무리가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저탁류에 의해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지층이 만들어진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다.13
만일 지층이 진화론에서 말하는 대로 오랜 시간에 걸쳐 차곡차곡 쌓여서 만들어졌다면,14 엄청나게 넓은 범위에 걸쳐 나란히 연결된 지층들15은 과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왜 그토록 넓은 지역에 걸쳐 위쪽의 지층과 아래쪽의 지층이 연결될 수 있게 반듯하게 평행을 이루고 있는가? 아주 오랫동안 엄청나게 넓은 범위에 걸쳐, 똑같은 양의 흙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르게 쌓였다는 뜻인가?
그리고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만약 ‘빠르게 지층이 형성’된다면, 그 과정에 필요한 엄청난 양의 퇴적물은 과연 어디서 어떻게 그렇게도 빨리 이동해온 것인가? 그냥 “오랜 시간이 흘렀고, 중간중간 격변도 일어났다”는 ‘혼합주의’라는 비빔밥을 적절하게 비벼 먹어야 하는 것일까? 이제는 녹(綠) 덩어리가 된 지층 누중의 ‘법칙’은 완전히 버려야 한다. 엄청난 양의 흙을 한순간에 운반할 수 있는 많은 물은 오직 전 지구적인 규모의 대격변(노아 홍수)이 있었다는 설명뿐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오류로 가득한 헛된 믿음을 의뢰하는 일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땅에게 말해 보아라. 그것이 네게 가르쳐 줄 것이다” – 대홍수의 증거(하)에서 이어집니다.
– 그림 출처 –
<그림1,2> www.youtube.com/watch?v=DC308D0TJkU (3:36 – 4:56)
<그림 3> 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tj/v8/n1/sand, Figure 3.
<그림 4> hydrolab.illinois.edu/conf/mhg50/media/
<그림 5> www.answersingenesis.org/articles/tj/v8/n1/sand, Fig 6a. Schematic formation of graded-beds.
<그림 6> www.youtube.com/watch?v=cBv-4jrzmNw&index=2&list=PLOO3qLy97ctmTkXICadmTwSpqC–msFDR (4:34 – 6:41)
각주
1 계시의 정의는 벌코프(Louis Berkhof)가 정리한 내용을 참고하였다. 『벌콥 조직신학(상)』, 고영민 역(譯), 기독교문사, pp. 135~219.
2 인간은 참 그 자체가 되는 해석을 할 수는 없다(롬 1:21). 이는 자연인이나 거듭난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참(truth) 그 자체가 되는 지식을 지닌 존재는 오직 하나님이시다(시 147:4; 사 40:28).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고 허망한 인간의 인식론적(epistemological) 통찰들을 우습게 여기신다(삼상 2:3).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그만큼만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을 따름이다.
3 “신앙과 학문의 분리”를 외치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불신자들에게는 이런 사실이 매우 어색하거나 괴이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또 다른 편에서는 “신앙과 학문의 조화”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진화론의 학문적인 결과들을 종종 받아들임으로써 신앙과 학문이 분리하게 하는 얼빠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창조 과학은 너무 교조주의적”이라며 지적설계론만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 말대로 하면 진화론 역시도 하나의 교조주의임(골 2:8)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 어리석은 자들은, 성경 세 쪽조차 온전하게 읽을 능력도 없어 보인다.
4 이재만, 『노아 홍수 콘서트』, 두란노, pp. 31~35.
5 지질학에서는 ‘layer’이라는 단어보다는, ‘bedding’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6 Berthault, G. (1998), “Experiment in Stratification”, Sarong (35 min DVD). 각주 4의 책 p. 49를 재인용(再引用).
7 http://www.youtube.com/watch?v=DC308D0TJkU
8 이재만, 『노아 홍수 콘서트』, 두란노, p. 50.
9 분급 실험에 관해서는 https://answersingenesis.org/geology/sedimentation/experiments-on-stratification-of-heterogeneous-sand-mixtures/ 를 참조하도록 하자.
10 Julien, P.Y., Lan, Y. and Berthault, G. (1994), “Experiments on stratification of heterogeneous sand mixtures”, Technical Journal, 8(1):37-50. 각주 7의 책 p. 51 재인용.
11 http://www.youtube.com/watch?v=cBv-4jrzmNw&index=2&list=PLOO3qLy97ctmTkXICadmTwSpqC–msFDR
12 Piper, D.J. W., and Normark, W.R. (1983), “Turbidite depositional patterns and flow characteristics, Navy Submarine Fan, California borderlands”, Sedimentology, 30:681~694 및 Porebski, S.J., Meischner, D., and Gorlich, K. (1991), “Quaternary mud turbidites facies modeling”, Sedimentology, 38:691~716. 각주 7의 책 p. 54 재인용.
13 1929년 캐나다 북동부 뉴펀들랜드 지역의 그랜드 뱅크스에서 발생한 진도 7.2의 강진에 의해 해저 쓰나미가 발생하였다. 이 쓰나미는 해저에서 모래와 진흙이 뒤섞인 강한 저탁류를 일으켰고, 12개의 해저 케이블을 끊어버렸다. 나중에 이 전선을 끊을 정도의 저탁류 속도를 계산해보니, 최저 시속 100km는 돼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저탁류의 위력이 상상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이 그랜드 뱅크스의 지진은 저탁류에 의한 지층 형성의 가능성을 인식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 1980년에 일어난 미국 워싱턴 주 세인트헬렌스 화산 폭발 사건에서는 화산재가 산을 덮은 뒤에 대규모 산사태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화산재와 물을 함유한 고밀도 진흙의 저탁류가 산 아래로 빠르게 흘러내려갔고, 산 아래쪽에는 7.5m 두께의 뚜렷한 지층이 형성되었다. 놀랍게도 이 지층이 형성되는 데는 다섯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같은 책, p. 54).
14 진화론적인 지층 형성 이론은 실험적 근거가 전혀 있을 수 없으며, 오랜 시간을 상정하기 때문에 증명할 수도 없다. 만약 증명하려면 여러 지층을 상대로 백만 년 이상 꾸준하게 실험해야 할 것이다.
15 앞의 실험에서 지층이 생겨나는 방식대로 지층을 계속 연장해보면, 넓은 영역에 걸쳐 서로 같은 지층이 평행하게 펼쳐지며 그 두께도 무척 두껍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땅에게 말해 보아라. 그것이 네게 가르쳐 줄 것이다”
대홍수의 증거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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