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 강해
(1)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 -하-
Geneva Reformed Church 제네바 개혁교회
Reformed Guardian 리폼드 가디언
The Band of Puritans 밴드 오브 퓨리탄스
Geneva Institute 제네바 신학교
오인용 목사
갈수록 사람들은 자기에게 목적을 두고 자기를 기뻐하고 즐거워하기 위해 이 세상을 삽니다. 삶의 목표도 거기 둡니다. 가장 안타까운 점은, 우리 그리스도인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많은 대화를 나누지만,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얘기보다는 자기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제가 오순절 은사주의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순절 은사주의는 자신의 체험을 얘기하기를 엄청나게 좋아합니다. “내가 이런 체험을 했고, 이러한 이적과 역사를 행했고, 이와 같은 것을 내게 주셨고……” 이렇게 자기를 기준으로 신앙을 정의해버리니, 하나님은 결국 노예처럼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 명령하듯 행동하게 됩니다.
특히 성령님을 그렇게 대합니다. “성령을 받으라.” 왜 그렇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마저도 자기의 생각과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사고가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비열하고 교활한 생각입니까! 그래서 저는 오순절 은사주의를 이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순절 은사주의는 분명히 이단입니다. 왜? 그들의 신학과 신앙 속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주인공이 되어, 어떤 쇼와 온갖 이적과 기적으로 인해 사람이 빛을 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부터 교회에 유행하기 시작한 일이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손뼉을 칩니다. 목회자가 나오면, 또 설교가 끝나면 박수를 칩니다. 예전 같았으면 정말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가장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대상이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런 일에 엄격해야 합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영광을 받으시기로 하신 거룩한 장소입니다.
이곳이 비록 물리적인 장소이고, 또 각 사람이 교회이긴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모일 때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누가 있으십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따라서 교회는 그분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분을 영광스럽게 찬양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거룩함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본래 순전하여 무죄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리를 탐내다가 흉측하고 무서운 존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죄의 지배를 받으며 하나님과는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연인, 즉 불신자는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 있습니까? 하나님과 원수가 된 상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아무리 고상한 취미를 갖고, 예술을 하고,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가장 좋은 지식을 쌓으며, 아무리 아름다운 옷을 입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바깥세상에는 지금 불신자들이 걸어 다니고, 차를 타고, 운동하고, 쇼핑하고, 책을 읽고 공부하고, 먹고 자고, 가족들과 함께 지냅니다. 매일 매시간 일분일초마다 저들은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교회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설령 하나님께 삿대질하지 않고, 욕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일 자체가 하나님과 싸우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가장 무서운 일이 그 일입니다. 불신자들은 그 일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모르기 때문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편안하게 살아갑니다. 계속 그 상태로 가면 결국 죽음이고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어쩌면 한 시간 뒤에, 한 달 뒤에, 하루 뒤, 사망으로 떨어질지 모르는데도 즐거워하고, 쇼핑하러 다니고, 친구를 만나고, 등산하고, 예술을 즐기며, 공부하면서, 자기를 위해 열심히 무언가를 추구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는 여전히 원수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의 실제 상태입니다.
소요리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람은 그와 같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더는 그 비참한 길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길을 향해 서 있지 말고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많은 교리학자들이 제1문에 대해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문항이다.”라고 설명합니다.
맞습니다.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불신자에게도 해당합니다. 전도할 때 이 소요리문답, 특히 1문은 더 그러합니다. 왜 그럴까요? 불신자는 자기 존재와 목적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사람이 왜 사는지 물으면 보통, “글쎄, 태어났으니 그냥 사는 거지.”라고 하면서 뚜렷하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물론 고상하게 대답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가장 온전한 대답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누군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왜 이 세상을 살아갑니까?”라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 때문에 삽니다. 그분을 예배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분을 찬양하고 높이려고 삽니다.” 이렇게 진심으로 대답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지금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제일의 목적을 완전히 무시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문화는 그 모든 것을 어디에 집중합니까? 모든 면에서 사람에게 집중합니다. 문화의 실체를 복잡하게 볼 필요가 없습니다. 문화는 사람을 위해 존재합니다. 영화배우, 스포츠 스타, 뮤지컬 가수, 유명한 소설가와 정치인이 대중과 지지자에게 환호를 받습니다.
보십시오, 이 세상의 문화는 전부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문화사역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한 마디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며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문화사역을 하면 할수록 교회는 어떻게 됩니까? 점점 사람의 교회가 됩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교회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문화사역 한다는 교회들 한번 다 찾아가 보십시오. 그런 교회들이 누구를 중심으로 예배 드리는가, 누구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가, 성경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가를 살펴보십시오. 전부 사람 중심입니다. 사람이 잘 되는 게 핵심입니다.
조엘 오스틴이 「잘 되는 나」라는 책을 쓰지 않았습니까? 그 책은 이 시대 그리스도인의 정신을 아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잘 되는 나.’ 내가 잘 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예배를 드립니다. 내가 잘 되어야 찬양도 나옵니다. 하나님 믿는 이유가 ‘내가 잘 되기 위한 것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오순절 은사주의로 대표되는 이러한 신앙을 따르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오순절 은사주의는 그 본질이 사람 중심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병 고치는 것이나 방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적 행함, 사람을 쓰러트리는 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어떤 환상을 보는 것이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아버지가 되시는 성부 하나님, 그분을 영원히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전제조건도 없습니다. 무엇을 더 붙이겠습니까?
여러분, 보십시오. 세상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앞에 찬양 드리고 영광 돌리는데, 무엇을 더 붙인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그분을 사랑하고,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 이상으로 더 잘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조엘 오스틴은 도대체 얼마나 더 잘 되려고 그런 책을 지었단 말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섬겨서 조금이라도 어떤 이익을 보려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면 절대로 안 됩니다. 가장 좋은 예배, 가장 잘 드리는 예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그분께서 나를 구원하신 일과 은혜를 베풀어주신 일, 그 자체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심령에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누리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 문화를 교회가 받아들여서, 하나님을 쫓아내고 사람이 주인이 되었습니다. 목회자들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사람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처럼 자기를 사랑하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담학자나 심리학자는 자신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식으로 가르칩니다. 그들은 성경에 그렇게 나와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사람이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다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말씀하시는 것뿐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마 22:39; 막 12:31) 사람은 이미 자기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엄청나게 사랑합니다. 그 사랑이 극치에 이르면 사람은 자살하게 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나르시스는 연못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해 죽었다고 합니다.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비록 신화지만 담겨있는 의미는 상당히 깊습니다. 자기 사랑의 극치는 자살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죄의 속성입니다. 그러나 죄에서 해방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점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죄인에게 “자기를 사랑할수록 더 고독하며, 빈곤하고, 정신적으로 더욱 방황하며, 심리적으로 더욱 불안하고, 육신도 더욱 병들고 지칠 것이다.”라고 꼭 얘기해주어야 합니다. 그 길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음을 알려줘야 합니다.
많이 벌수록,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은 정신적으로 피곤해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자기를 사랑하려고 그 모두를 개발해냈기 때문입니다. 왜 자동차를 개발합니까? 편하게 가려고 개발했습니다. 왜 기술을 개발합니까? 자신을 섬길 도구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막상 만들어놓고 보니, 더 피곤하고 힘듭니다. 시간이 절약되고 편리해졌으니, 심리적으로 안정될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좋은 기술과 문화가 나오면 나올수록 사람은 더 힘들고 어려워집니다.
여러분,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귀한 답에 별도로 한 가지를 더하고자 합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다른 일을 잘하려고 하지 말고, 예배를 잘 드리려고 해야 합니다. 엉터리 같은 예배를 일주일에 대여섯 번, 열댓 번씩 드리지 마십시오. 일주일에 두세 번만 드린다 해도 올바르게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영혼들이 살아계신 성 삼위 하나님께 가장 영광스럽게 예배 드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로 온전하게 예배 드릴 수 있도록 교회가 이끌어 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의 존재 목적입니다. 교회는 이 이외에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오만 가지 프로그램을 들여놓고 교인들을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바쁘게 돌리는 일이 교회가 할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교인들은 교회 갔다 오면 더 힘들고 고통스럽고,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머리가 아픕니다. 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과 똑같이 심령에 참된 기쁨과 만족이 없습니까? 교회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교회조차도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상태이기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가장 좋은 상태가 언제입니까? 저는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때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예배를 정말 주님을 위해서 드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나를 위해 예배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잘 되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까? 어떤 대단한 일을 체험하려고 예배 드리시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예배 드리는 것은 아닙니까?
이러한 잘못된 것에는 관심을 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오직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며, 이 시간 영으로 임재하시는 성 삼위 하나님을 영원무궁토록 예배하는 일에 관심을 두십시오.장차 영원히 하나님 앞에 서서 해야 할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도 그분을 예배하고 영화롭게 하려는 이 한 가지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가장 완전하게 자기 존재 목적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진정 최고의 상태에 있습니다. 인간이 가장 좋은 상태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입니다.
그에 비해, 오늘날의 예배는 얼마나 부실합니까? 얼마나 세속적입니까? 얼마나 인본주의적입니까?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을 오려내고 가려버렸습니까? 교회에서 얼마나 사람이 주인공이 됐습니까? 목사는 스타가 되었습니다. 목사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냅니다. 어리석은 찬양 사역자들이 앞에 나와 방방 뛰고 난리를 치며, 교회를 시끄러운 집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그와 같은 더러운 방식으로 예배해서는 안 됩니다. 온전하고 순전한 중심으로, 올바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제1문이 말하는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답을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지 마십시오. 시편 73편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가득한 영적인 갈망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이번 한 주도 매 순간 하나님 앞에 이러한 믿음으로 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소요리문답 강해
(1)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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