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전통문화 진단2」 명절과 신앙
김재호
▲ 추석 때 가정에서 차례를 지내는 모습
<출처: (CC-BY-NC) Joseph Steinberg (rokinfidel, flickr)>
사람의 본성에는 무언가를 함께 기리고 기념하려는 성향이 존재한다. 그래서 어떤 민족이든지 각기 고유한 명절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명절이 다가오면 다 함께 한자리에 모여서 무언가를 기리고 기념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고 서로 우애와 친밀함을 나눌 생각으로 마음이 들뜬다. 그리스도인도 사람인 만큼 이러한 사회, 문화적 현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명절을 영적인 측면에서 적절하게 이해하고 대처하는 지혜를 가져야만 한다.
1. 명절, 믿음의 시련을 이겨내야 하는 시기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에게는 명절이 존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받을 천국 백성이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기리고 기념해야 할 대상이 있다면,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고 장차 이 세상을 심판하실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명절이라고 할 만한 날은 오직 주일뿐이다. 그날, 우리는 한자리에 모여 주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장차 임할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안식을 누린다. 주일은 성도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영적인 명절이다(느 8:9~12). 그러나 이러한 믿음의 대상도,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도 없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현세적인 무엇을 기리며 기뻐하는 명절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인 명절이 바로 계절과 관련된 명절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자연 만물을 통해 당신께서 어떤 분이라는 사실을 밝히 나타내신다(창 1:14; 행 14:15~17; 롬 1:19, 20).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사람은 그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 만물과 질서를 바라보면서 크게 경탄하고 신비해 하면서, 뭔가 신적(神的)이고 궁극적인 것에 관한 인상과 느낌을 이야기하곤 한다.
대표적으로, 사람은 매일 뜨고 지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일종의 불멸성과 영속성을 감지해내곤 한다. 그래서 유명한 고전 영화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고향의 참담한 현실 앞에서도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것”이라고 읊조릴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관객들이 그 대사에 깊은 인상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 밖에도 사람들은 한 해의 시작과 마무리 및 결실기를 기념하면서, 그것을 곧잘 인생과 연결한다. 그러면서 우리 인생이 항상 새롭고 풍요로우며 재앙이 없기를 기원한다.
이처럼, 사람은 자연 만물과 질서에 새겨진 하나님의 신적 속성을 분명하게 지각하므로, 단순한 계절 변화로 인해 생겨난 명절이라고 해도 절대로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분명히 인간의 자연 종교심에 기초한 일종의 종교 의례가 꼭 포함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유교, 불교, 무속 신앙의 영향력이 큰 나라이므로, 명절 문화 전반에 그런 요소가 짙게 배어 있는 편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명절 문화에 숨어있는 그러한 요소들을 잘 분별해서 대처하려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이건 별 의미 없는 것이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라거나 “뭐 이런 것까지…?” 혹은 “이건 그냥 전통문화에 불과하다.”라는 식의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영적으로 거룩할 것을 명령하시며, 성도가 귀신과 교제하는 일을 가장 엄하게 금지하시기 때문이다(고전 10:20).
2. 설과 추석: 유교, 불교, 무속 신앙의 영향을 크게 받은 민족 최대의 명절
우리 민족에게 최대 명절은 설과 추석이다. 한 해의 시작을 기리는 설과 풍성한 수확을 기뻐하는 추석은 사람의 보편 정서에 잘 맞는 명절이다. 그래서 설과 추석의 정확한 기원과 유래를 확인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두 명절은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나올 정도로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과 함께 해왔다.1 또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민족 최대의 명절로 남아 있다.
우리 민족은 설이나 추석이 다가오면 온 집안 식구가 한자리에 모여서 차례를 지낸다. 그런 뒤에 설에는 떡국, 추석에는 송편을 나누어 먹으면서 정을 나눈다. 우리 민족이 이런 형태로 설과 추석을 쇠게 된 데에는 유교, 불교, 무속 신앙의 영향이 아주 컸다. 우리 민족의 기본 정서는 둥글둥글해서 모나고 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권위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소외되는 사람 없이 모두가 함께 즐거워하고 어우러지는 일을 가장 기뻐하고 좋아한다.
그런 민족 정서는 효(孝)와 예(禮), 그리고 중용(中庸)을 강조하는 유교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원래부터 많았다. 더구나 중국 바로 옆에 있는 데다 한자(漢字)를 문자로 사용하는 점 때문에, 유교의 가르침은 이미 삼국시대 때부터 우리 민족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2 그러다가 고려 시대 불교의 폐단을 분명히 목격한 조선 왕조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고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펴면서부터, 우리 민족의 삶에는 유교의 가르침이 깊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유교의 기본 가르침은 성선설(性善說)을 바탕으로 하는 인, 의, 예, 지, 신(仁義禮智信)이다. 한마디로 말해, 유교는 사람으로 태어난 도리를 다하면서 선하게 사는 것이 바로 인생의 근본 이유이자 목표라고 가르친 셈이다. 따라서 유교 사회에서 불효와 불충, 그리고 무례함만큼 악한 죄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런 죄는 인생의 근본 의의를 저버리고 거스르는 행동이므로, 가장 엄한 형벌로 다스렸다. 그렇게 유교는 원래 가족 중심의 공동체 지향적 성향이 강했던 우리 민족에게 인생의 기본 의의나 정치의 기본을 이해하게 하는 기초 세계관을 제공해주었다.
우리 민족이 기초 세계관으로 받아들인 유교에서는 모든 사회 구조의 근본이자 모형으로서 가족을 꼽는다. 모든 사회관계가 가족 관계의 원리를 따라가야 마땅하며, 그런 사회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라고 여겼던 것이다. 다시 말해, 유교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인(仁)을 토대로 마땅히 해야 할 각자의 도리를 다해야 하는 것처럼, 사회 역시도 그러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유교 사회에서는 부모가 자녀를 마땅히 사랑하고 가르쳐야 하며 자녀도 부모를 마땅히 공경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처럼, 임금과 백성, 선생님과 제자 사이도 그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유교 사회에서는 ‘아비, 어미도 없는 후레자식’이라는 말이 가장 큰 욕이 된다. 이 말에는 ‘네가 그렇게 막돼먹은 것은, 너를 낳아준 아비, 어미가 사람이 아니라 개, 돼지라서 그런 것이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처럼 유교 사회는 어떤 일이든지 결국 그 사람을 낳아준 부모에게로 근본적인 원인과 책임이 돌아가게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유교 사회의 가치 체계와 구조는 나를 낳아준 부모를 이 세상에 있게 해준 조상에게 아주 특별한 지위와 역할을 맡기는 일을 불러온다.
아니나다를까 유교에서는 자식이 부모에게 효를 행하듯이 마땅히 조상에게도 효를 다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바로 이 대목에서부터 유교는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산 자와 죽은 자가 서로 교통할 수 있는 잘못된 토대를 마련하기 시작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크게 성공했다면, 그것은 결국 누구의 은덕이겠는가? 우선, 그 사람의 부모를 거쳐, 궁극적으로는 그 부모를 이 세상에 있게 해준 그 집안의 조상에게 영예가 돌아갈 것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어려움을 겪으면 왜 그렇다고 여겨지겠는가? 먼저, 그 사람의 부모를 거쳐, 궁극적으로는 우리 조상 중에 분명히 큰 죄를 지은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고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조상 제사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잘사는 사람에게는 잘사는 것에 대한 공경과 감사와 효행의 의미를 지니고, 또 못사는 사람에게는 이제 우리 집안도 예전과는 다른 사람답게 사는 집안이 되었다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더불어 후손들이 행하는 그러한 정성 어린 효행(孝行), 즉 제사가 조상의 마음을 실제로 기쁘고 흐뭇하게 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또, 그런 효행을 하지 않는 막돼먹은 후손에게 죽은 조상이 실제로 진노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시 말해, 그런 조상의 흐뭇함과 진노가 이 세상을 살고 있는 후손에게 아무런 영향(복과 천벌)도 끼칠 수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유교가 말하는 인(仁)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관계는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흔들리면서 공허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는 좋든 싫든 죽은 조상에게도 마땅히 성심성의껏 효를 다해야 한다고 가르쳐야만 한다. 죽은 조상이 그런 효행을 기뻐하여 복을 내리든지, 불효에 진노하여 재앙을 내리는 자리에 앉아 있다고 가르쳐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교에서는 조상이 사실상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유교의 가르침이 우리 민족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자, 명절에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는 풍습이 차츰 자리를 잡았다. 물론,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는 ‘성(姓)도 족보도 없는 상것들’이 전체 인구의 70%를 차지했으므로, 조상 제사는 대중적인 풍습이라기보다는 ‘지체 높으신 양반’들의 삶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3 그러나 조선 중기에 이르러 중인들이 경제적으로 부유해지자, 중인 계층은 양반 흉내를 내는 수준을 넘어 아예 양반이 되기 시작했다. 돈을 주고 족보를 사들여서 가문을 세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4
그래서 ‘양반’이라는 호칭은 시간이 갈수록 ‘지체 높으신’ 상위 10%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기보다는, 그냥 사람을 가리키는 일반 호칭처럼 의미가 점점 변해갔다. 그러다가 구한말에 이르러서 신분 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이 ‘뼈대 있는 가문’임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조상 제사는 각 집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가정의례로 급속히 자리를 잡아갔다.5
그러나 일반 백성이 어떻게 유교의 그 고고한 가르침을 하루아침에 통달할 수 있겠는가? 개화기 무렵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99%에 달했고, 광복 직후에는 80%에 달했다고 한다.6 조선 시대 때는 글자를 유교 경전을 통해서 깨우치게 했으니, 결국 이 수치는 유교 사상을 제대로 배우고 익힐 기회가 일반 백성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일반 백성들은 주변에서 이렇게 저렇게 주워들은 풍월로 기초적인 유교 사상을 터득하고 난 뒤, 그것을 토대로 각자의 형편과 기호에 맞게 이리저리 다른 사상과 종교를 변형하고 혼합해서 자신에게 맞는 의례를 확립해나갔다는 뜻이다.
실제로 유교에서는 본래 제사 음식을 여성의 손에 맡기지 않는다. 조상에게 올릴 제사 음식은 남성들이 정성을 다해 마련하여 제사를 지낸다.7 오늘날처럼 TV 리모컨을 쥐고 방바닥과 배를 긁으면서 떡과 전이나 축내다가, 때가 되면 주섬주섬 옷을 차려입고 나와 제사를 드리는 풍경은 사실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명절 풍습은 백성들이 기본적인 유교 정신을 토대로 삼아, 불교와 무속 신앙 등을 각자의 입맛에 맞게 버무려서 만들어낸 혼합주의적인 결과물로 봐야 한다. 실제로 설 떡국과 추석 송편에는 각기 태양, 달 숭배 사상이 끼어들어 있다.8 어디 그뿐이던가? 송편을 예쁘게 빚으면 예쁜 딸을 낳는다는 소리부터, 오래 살라고 길게 가래떡을 뽑는 일, 복조리를 벽에 걸어두고 복을 기원하며, 토정비결로 신년 운수를 점치는 일에 이르기까지, 무속 신앙이 우리 명절 풍습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확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따라서 영적이고 성경적인 측면에서 본 설과 추석은 즐겁고 좋은 날이라기보다는 참으로 비통한 날에 가깝다. 우리 동포 대부분이 귀신과 교제하는 가운데 육신의 복과 유흥을 추구하며 먹고 놀고 자는 날로 보내왔기 때문이다. 신앙이 있다고 하는 집안에서도 이러한 비참한 현실은 잘 바뀌지 않는다. 물론, 신앙이 있다고 하는 집에서 조상 제사를 지내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겉만 보면 참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찬찬히 내실(內實)을 헤아려보면 정말로 바뀌었다고 할 만한 것은 많지 않다.
조상 제사 자리를 대신한 현대의 명절 가정 예배는 현세적인 복을 받기를 바라는 말씀으로 시작해서 육신적 성공과 건강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로 끝맺어진다. 복을 비는 대상이 조상에서 하나님으로, 제사상이 성경과 찬송가로 바뀌었을 뿐, 실제 내용은 예전에 하던 그대로이다. 더욱이 가정 예배가 끝난 뒤에 먹고, 놀고, 자기를 반복하면서 술 취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풍토도 여전하다.
이 땅에 복음이 전해진 지 100년이 넘었다고는 하나, 실제 삶의 현장에서 이렇다 할 만한 영적 각성의 증거를 찾아보기는 여전히 어려운 처지이다. 우리나라 그리스도인은 명절만 되면 늘 해오던 대로 육신적인 유흥과 복에 절어 지내다 오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한국 교회가 처해 있는 영적인 실제 현실이자 성적표인 셈이다.
3. 그리스도인의 명절 나기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명절이 다가오면 이러한 영적 현실과 맞붙어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현세적인 복과 유흥을 추구하면서 시간만 축내는 일을 가장 유의해야 한다. 만약 이 부분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제사를 그만두고 미신적 행위를 몰아낸다고 해도 별 소용이 없다. 빛의 천사로 가장한 마귀는 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따라 계속 경배를 받으려고 할 것이고, 또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명절이 다가올수록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틈타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큰 전쟁을 앞두고 있는 그리스도의 군사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명절 풍습 전반에 짙게 배어있는 전통 신앙의 영향력에 휘둘리지 말고, 오직 성경 말씀을 따라 거룩하고 경건하게 명절을 보낼 영적인 채비를 갖추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명절을 친지에게 복음과 진리를 증거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 성경은 절대로 혈육의 정을 무시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혈육의 정이 신앙보다 앞설 경우, 그것을 우상숭배로 규정하여 정죄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일반 세상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마음을 쓰는 것보다도, 가족과 친지에게 복음과 진리를 증거하는 일에 더 마음을 쏟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 그가 속해 있는 가족 모두에게도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는 분이시다(행 16:30~32).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명절이 다가오면 친지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증거하기 위해 청교도 개혁주의 주석을 참조하고, 과연 그러한가 하여 본문을 상고하면서 그 뜻을 깊이 헤아리고 확증해야 한다.
또한, 친지들의 영적 상황에 알맞은 신앙 도서를 선정하여 선물해주면서, 그들도 우리가 누리는 구속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러므로 명절 가정 예배 때는 될 수 있는 한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의 비참함과 구원의 은혜’를 전하는 일에 힘쓰는 것이 좋다. 또한, 그러는 가운데 외적인 불신앙의 잔재들을 깨끗이 하는 일에도 힘써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기초 토대를 잘 갖추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육적인 본성을 자극하지 않게 절제하고 주의하면서 건전한 혈육의 정을 나누어야 한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과 즐거움, 그동안 있었던 일,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이나 어려움, 즐겁고 기쁜 일 등등을 함께 나누면서, 하나님께서 한 혈육으로 엮어주신 뜻을 헤아리며 감사하는 시간으로 보내야 한다. 우리 타락한 본성과 하나님 경외함이 없는 이 세상의 사회 구조는 평소에 그러한 일 하기를 어렵게 하므로, 온 식구가 한자리에 모이는 명절만큼 혈육의 의의를 건전하게 되새길 기회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신앙의 테두리 안에서 혈육의 정을 건전하게 나누며 명절을 즐겁고 기쁘게 보내는 일은 지극히 선하고 좋은 일이다. 물론, 그러한 혈육의 정이 지나쳐 우상숭배처럼 되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마 19:37, 38). 혈육의 정을 계명보다 앞세우는 일은 제사상에 절을 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힘겹게 조상 제사를 물리치고 난 뒤에, 친족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주일 성수를 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도록 하자.
4. 마무리하며
그리스도인은 만사를 성경에 따라 영적으로 가치를 평가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명절이라고 해서 이러한 일에 예외를 둘 수는 없다. 혈육의 정도, 민족의 정체성과 동질성도,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말씀보다 앞설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덜 중요하게 여길지를 깊이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마 6:24).
하나님 말씀을 혈육의 정보다 더 중시하는 이들에게는 혈육의 정을 초월한 구속(救贖)의 은혜가 온 집안에 가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것들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의 집안에는, 주님보다 돈을 더 사랑한 가룟 유다가 받은 영원한 저주가 임하여 그들 모두를 영원한 사망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각주
1 https://ko.wikipedia.org/wiki/한국의_설날, https://ko.wikipedia.org/wiki/추석
2 이연상 발행, 『브리태니커 세계 대 백과사전 17권 (Britanica World Encyclopedia)』, 한국브리태니커, 1993, p. 211.
3 황교익, 「[황교익의 먹거리 Why?파일] 판박이 추석 차례상… 정작 제철 음식은 없다」, 조선일보, 2013.9.14.
4 같은 기사.
5 같은 기사.
6 김정옥 기자, 「한국 개화기 함께 한 근대화 유산 명성」, 광주매일신문, 2014.6.23.
CBS 박재홍의 뉴스쇼, 「초등 교과 한자병기 필수 vs 광복 70주년에 기가 차」, 노컷뉴스, 2015.5.5.
7 황교익, 「전통대로라면 명절 음식 남자가 만들어야」, 오마이뉴스, 2014.8.27.
8 https://ko.wikipedia.org/wiki/한국의_설날, 이재경 기자, 「중추절 유래와 송편은 왜 반달 모양일까?」, 글로벌이코노믹, 2015.9.9.
「전통문화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전통문화 진단2」 명절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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