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재해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재난 재해 진단1」 자연주의의 덫에 걸린 현대인들
김재호
▲ 전국을 혼란과 공포로 몰아넣었던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바이러스의 모습
출처: (CC-BY-SA) Scinceside, wikipedia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큰 재난과 재해에는 분명히 어떤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믿으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큰 국가적인 재난이 찾아오면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종교적 조치와 행사가 뒤따르곤 했다. 이교도 국가에서는 이방 신에게 제사를 드렸고, 기독교 국가에서는 온 국민이 마음을 다해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더는 옛사람의 생각을 따르지 않는다. 현대인은 큰 재난과 재해가 찾아와도 그 일의 원인을 오로지 자연 과학적으로만 분석하려고 한다. 그러고는 발견된 문제점을 해결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일로 바쁠 뿐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 전체를 큰 혼란과 공포로 몰아넣은 일명 ‘메르스 사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바이러스가 어떻게 전파되는지, 병실 구조나 간병 문화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엄청난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중동에서 유행하는 바이러스가 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그토록 크게 창궐했는지에 대해 영적인 의미를 탐구하려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나라의 ‘메르스 사태’는 중동호흡기증후군 바이러스로 시작해서, 중동호흡기증후군 바이러스로 끝났다고 말해도 별로 지나치지 않다.
이처럼 재난과 재해를 바라보고 이해하는 옛날 사람의 시각과 오늘날 사람의 시각은 완전히 다르다. 그렇다면 무엇이 사람들의 시각을 그와 같이 바꿔놓았던 것일까? 지금부터 그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자연주의, 현대인에게는 친숙하지만 근본적인 결함을 안고 있는 사상 체계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인류는 원래 자연 만물과 현상에는 어떤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고 믿었다.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조차도 중력 현상을 설명하면서 “만물에는 본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귀소(歸巢) 본능이 있다.”라고 할 정도였다.1 이런 말은 현대 자연 과학자에게는 물론이고 일반인에게조차 생소하게 들릴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저런 사고방식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보편적이었다. 아마도 그 당시 사람들 대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이 상당히 설득력 있고 근거가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소 황당한 중력 이론은 중세 시대를 다 지나기까지도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다.2
고대인과 현대인 사이에 존재하는 이 거대한 인식 차이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자연주의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 왜냐하면 현대인에게는 자연주의가 지극히 자연스럽고 친숙한 사상 체계이지만, 반대로 고대인에게는 상당히 낯설고 과격한 사상 체계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대인도 자연주의적인 사고방식을 어느 정도 구현하면서 살아가기는 했지만, 전적으로 그러한 사상 체계를 따르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다면 자연주의란 무엇이며 그 의의는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한 올바른 답을 얻으려면, 우선 자연주의가 근본적으로 무신론 체계라는 사실을 꼭 이해해야 한다. 자연주의란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자연 만물 외에는 다른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前提)’ 안에서 온 세상 만물의 의미를 이성적으로 해석하려는 사상 체계이다.
설령, 자연 이상의 어떤 존재가 있다고 한다 하더라도, 곧장 그 존재를 온 우주 만물과는 완전히 분리된 어떤 존재로 규정한다. 그래서 그 존재가 자연 만물과 현상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해버린다. 다시 말해, 자연주의에게 신(神)이란 있으나 없으나 별 상관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게 자연주의는 자연 만물과 현상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를 깨끗하게 지워버린 뒤에, 온 자연 만물과 현상을 오직 사람이 이성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물리, 화학적인 원리로만 설명하려고 한다. 현대인은 그러한 방식으로 온 세상 만물과 현상들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일이 참으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중력 현상을 귀소 본능에 근거한 유비 추론으로 설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이, 현대인에게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우스운 설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주의의 근본 전제를 잘 살펴보면, 그 전제가 상당히 자의적이고 심하게 편향적이라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자연주의가 말하는 것처럼 이 세상을 정말 물리, 화학적 원리만 가지고서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물리, 화학적인 신호를 열심히 수납(受納)하는 중인 꼴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우리가 정말 물리, 화학적인 신호를 위해서 글을 쓰고 읽고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처럼 물리, 화학적 원리가 정말로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려면 물리, 화학 이상의 도덕적, 영적 실재를 꼭 전제해야만 한다. 자연 만물과 현상이 정말 자연주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 그런 자연은 우리 사람의 인간성과 인격성을 말살하고 파괴하려고 하는 매우 위협적인 존재로 나타날 것이다.
이처럼 자연주의의 자의성과 편향성은 온 세상을 아무 의미도 발견할 수 없는 공허하고 삭막한 폐허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므로 자연주의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행동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의 헛된 아집과 같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근본적으로 흠이 있는 사상 체계가 현대인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주요 사상 체계가 된 것일까? 현대인이 죄다 바보라서 그렇게 생각하며 사는 것은 분명히 아닐 텐데 말이다. 자연주의가 현대인의 사고방식에 그토록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와 상황이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그런 엄청난 원동력을 제공했던 것일까? 지금부터 그 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2. 허탄한 신화(神話)와 거짓 종교, 자연주의의 요람
자연주의가 오늘날처럼 융성하게 된 데에는 허탄한 신화와 거짓 종교의 공로가 지대했다. 인류가 자연 만물과 현상에는 물리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영적인 의미가 담겨있다고 본 것은 원래 지극히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죄 가운데 태어나는 사람의 영혼은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뜻과 계획을 온전히 아는 데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같이 그 어렴풋한 지식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여 피조물인 자신을 높이는 우상숭배와 교만의 재료로 사용하는 길로 치우치고 만다(행 17:27; 롬 1:19~23).
즉, 자연주의가 우물 안 개구리의 무지몽매함 속에 갇힌 폐쇄적이고 편향된 사상 체계라면, 자연 종교는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하여 코끼리의 정체를 알 수 없게 만드는 심히 부조리한 가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절대로 사사로운 평가나 판단이 아니다. 두 체계가 딛고 서 있는 토대와 전제를 지극히 근본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주의가 아무리 혁신을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자연 종교가 하늘에 닿기 위해 용을 써도 이 평가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물론,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을 박차고 나오거나, 장님이 눈을 뜨면 그 평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그 개구리는 우물 ‘밖’ 개구리이며, 장님은 더는 장님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안심하고 위에서 말한 평가를 따라 자연주의와 자연 종교를 바라보고 대해도 된다. 사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이 일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물론, 그러한 평가가 자연주의자와 자연 종교인에게는 지극히 불쾌하고 모욕적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 그러한 것을 어찌하겠는가? 우리에게는 그들이 우물 ‘밖’ 개구리와 ‘한때’ 장님이었던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참된 긍휼의 마음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처해있는 영적 상태가 그러하다는 사실까지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다.
참 사랑은 거짓을 기뻐하지 않고 정직과 진실을 기뻐한다(고전 13:6). 사람이 정말로 고침을 받으려면, 먼저 병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진단받아야 한다. 나아만이 나병을 치료하기 위해 요단 강에 들어갔을 때, 먼저 그는 참으로 감추고 싶었던 자기 환부를 만천하에 드러내야만 했다(왕하 5:1~14).
진정한 사랑은 사람을 죄라는 몹쓸 질병에서 건져내기 위해, 먼저 죄의 진상을 정말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정도로 명백하게 드러낸다. 그런 뒤에, 그 죄가 요구하는 모든 실질적인 대가를 그리스도의 은혜로 대신 치러주고 품어준다. 그리하여 죄인이 더는 죄에 얽매이지 않고 참 자유 속에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
그 사랑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 즉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이며 참된 용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사랑이라는 구실을 앞세워서, 죄와 허물이 일으키는 참상 자체를 왜곡하고 합리화하는 거짓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죄인에게 참 자유를 베풀어 줄 수 없는 허탄한 거짓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연 종교는 자연 만물과 현상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해낼 수 없다. 오히려 가면 갈수록 허망하고 괴이하며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말을 계속 쏟아낼 뿐이다. 그 결과, 자연종교에는 보편적인 사고방식과 상식으로도 명백하게 구별할 수 있는 심각한 일그러짐과 부조리함이 점점 가득하게 된다. 그렇게 생겨난 병폐들은 사람의 인격과 삶을 점차 병들고 지치게 한다.
그러한 일그러짐과 부조리함에 상하고 시달리면 사람들은 거기서 돌아서려고 하게 된다. 처음에는 자연 만물과 현상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다소 제한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아예 배제하려는 쪽으로 급격하게 힘이 실린다. 그때, 사람들은 참된 계몽과 발전의 빛을 발견하며 기뻐한다.
그와 함께 허탄한 신화와 거짓 종교는 사람들의 실생활에서 밀려나, 점점 재미있는 옛날이야기가 되어간다. 끔찍했던 신화와 거짓 종교의 폐해는 점점 책에서나 접할 수 있는 흥미로운 일로 변해 간다. 사람들은 그러한 변화를 바라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사회가 발전하고 인류가 계몽되고 있는 증거라고 찬탄을 보낸다.
그러나 그런 변화는 참된 계몽이나 사회 발전이 아니라, 우물 안 개구리의 퇴폐적인 자기 세뇌와 착각에 불과하다. 실제로 허탄한 신화(그리스 신화)와 거짓 종교(로마 카톨릭)에서 돌아선 근대 세계는 기계론 철학을 따라 자연 만물과 현상에서 도덕적, 영적 실재와 의미를 차례차례 제거해 나갔다.
그 결과, 근대 이후로는 이 세상에 관한 물질적인 지식은 엄청나게 증가한 데 비해, 그러한 지식을 어떻게 사용해야 올바른가에 관한 도덕적, 영적 지식은 날로 퇴보를 거듭했다. 말도 안 되는 괴이함과 부조리함이 사라진 바로 그 자리에, 말도 안 되는 냉혹함과 부도덕함이 활짝 꽃피운 것이다.
역사는 그러한 토양 위에서 물질문명이 번성하면, 반드시 퇴폐적인 성(性) 문화와 광기 어린 대살육(大殺戮)과 전쟁의 물결이 온 땅을 휩쓸고 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피상적인 개선(改善) 뒤에 가려진 더 큰 폭풍의 실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 결과,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칭송하던 빛나는 계몽의 시대는, 결국 피와 난잡함으로 점철된 어둠의 시대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눈뜬장님과 같은 허탄한 신화와 거짓 종교는 자연주의라는 외눈박이를 낳았고, 그 외눈박이는 자라서 인종 청소와 군국주의라는 진짜 장님을 낳고 만 것이다.
3. 참된 종교, 자연 연구(硏究)의 확실하고 균형 잡힌 토대
자연주의라는 결함 많은 사상 체계가 허탄한 신화와 거짓 종교의 요람에서 자라난다는 사실을 제대로 깨닫고 이해한다면, 무엇이 올바른 사상 체계인가 하는 문제는 오직 참된 종교가 무엇이냐에 달려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즉, 진정한 자연 과학이 무엇이냐의 문제는 자연 과학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진리를 균형 있게 아우르고 통합할 수 있는 참된 종교적 진리가 무엇이냐에 의해 판가름 나는 것이다. 그 진리가 그러한 능력과 속성을 정말로 갖추고 있느냐 아니냐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
그래서 이 대목에 이르면, 어떤 종교이든지 자신이 바로 그 진리라고 주장하면서 수많은 증거를 제시하게 되는데 그러한 활동을 일컬어 변증(辨證)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는 종교의 숫자만큼이나 각개각색의 변증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중에서 기독교만큼 영적인 측면과 물질적인 측면을 균형 있게 아우르는 변증에 성공한 종교는 역사상 단 하나도 없다.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는 기본적으로 이원론(二元論)을 가르치거나, 반대로 범신론(汎神論)이나 내재신론(內在神論)을 가르친다. 그래서 이런 종교가 번성하면 사람들은 현실 세계의 의미와 가치를 평가절하하거나, 반대로 현실 세계에만 몰두하는 현상이 뚜렷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는 온 천지 만물과 완전하게 구분되는 별개의 존재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가르친다. 그와 함께, 그 하나님께서 당신의 속성을 따라 온 천지 만물을 지으셨고 지금도 친히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도 같이 가르친다.
즉, 기독교는 하나님의 신적 속성을 말할 때 보편적인 인간의 상식과 이성을 완전히 초월하여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스스로 충족하신 하나님께서 지으셨고 오늘도 그분의 계획과 섭리 아래 유지되는 이 세상에 관해 말할 때는, 상황이 전혀 달라진다. 그때는 그러한 하나님의 존재가 도리어 보편적인 인간의 상식과 이성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토대 역할을 한다.
그래서 코넬리우스 반 틸은 철학자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하나와 여럿’이라는 철학의 아주 오래된 근본 난제에 대해, ‘영원한 하나와 여럿’이라는 답을 내놓았던 것이다. 즉, 반 틸은 그 골치 아픈 문제의 답과 근거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실재와 그분의 신적 속성을 제시한 것이다.3
이처럼, 기독교의 하나님은 피조물과 전혀 뒤섞이지 않으시면서도, 세상 안에서 온 땅을 친히 다스리시는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이 세상의 그 무엇에 조금도 의지하지 않으면서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해주고 그 이해한 것을 지탱해주는 지혜와 지식의 보고(寶庫)와 같다. 그래서 기독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호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인 사실과 증거에도 열렬하게 호소하는 것이다(행 13:32~39; 고전 15:5~8).
기독교는 조금도 현실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전혀 현실을 무시하지 않는다. 도리어 현실이 참으로 현실일 수 있는 유일한 근거를 제공해주면서, 현실을 왜곡하며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는 온갖 허탄한 소리와 맞붙어 싸우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이 땅이 아니라 장차 임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만 소망을 두게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독교는 사람을 순교자가 되게 할 수는 있어도, 혁명 분자나 폭력 분자(테러리스트)가 되게 하지는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솜씨를 높이고 찬양하는 창조 과학자나 예술가가 되게 할 수는 있으나, 진화론자나 저속하고 퇴폐적인 예능인이 되게 하지는 않는다. 더불어 수도원에 틀어박혀 금욕하며 하는 삶을 신성시하는 일도 멀리하게 한다. 기독교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정직하게 자기 생애를 꾸려가는 근면 성실한 사람이 되게 한다.
그런 열매야말로, 기독교가 바로 그 참된 종교라는 가장 완벽한 증거이자 훌륭한 변증이 되는 것이다. 그런 조화와 균형이 가능한 하나님의 실재를 가르치면서, 그분을 모든 진리의 근거와 토대로 삼으라고 가르치는 종교는 오직 기독교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그런 선한 열매를 맺는 우리 삶을 볼 때 어떻게 그런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신기하게 여기며 그 비결을 묻게 된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당신이 어떤 분이라고 계시하셨는가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어야 한다(벧전 3:15, 16). 그렇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에 대한 영적인 의미와 물질적인 의미를 균형 있고 조화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신 분이 누구인지를 그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그러한 우리의 변증이 세련된 철학 이론에 비하면 별 볼 일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참된 변증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자연주의라는 자기만의 우물 및 허탄한 신화와 거짓 종교라는 어둠에서 벗어나서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도록 역사해주실 것이다.
4. 마무리하며
기독교는 자연 만물과 현상에 담긴 영적인 의미와 물질적인 의미 모두를 확실하고 균형 있게 파악하고 활용하게 하는 유일한 참 종교이다. 기독교가 일반 학문이나 자연 과학의 발전을 저해했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거짓된 기독교인 로마 카톨릭이 그런 일을 한 것이지, 참된 기독교인 개혁주의는 오히려 학문을 권장하며 융성하게 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며 불변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은 종교개혁시대 과학자들은 자연 만물에는 일정한 질서가 내재해 있기에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고 측정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은 자연 과학의 발전에 기름을 부어주는 역할을 했다.
또한 계몽주의의 광포한 먹구름이 몰려올 때 일어난 부흥의 불길은, 그 무신론적 광풍이 사람들을 허무와 공포로 몰아넣는 일을 무려 200년이나 뒤로 늦춰 주었다. 만약 그때 참된 기독교의 부흥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성(理性)의 시대는 훨씬 더 냉혹하고 참담하며 우울한 시대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마귀는 자신이 극단에 치우쳐 있어서 그런지, 사람을 양극단으로 몰아 멸망에 이르게 하기를 무척 좋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쪽 모두를 온전히 보존하는 참 진리인 성경 말씀을 굳게 믿고 따르도록 하자. 그리하면 우리는 무사히 요단 강을 건너서, 우리가 영원히 안식할 본향(本鄕)인 새 하늘과 새 땅에 평안히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 김성근, 『교양으로 읽는 서양 과학사』, 안티쿠스, 2009, p. 27.
2 위의 책, p. 29.
3 코넬리우스 반 틸, 『변증학 (The Defense of the Faith)』, 신국원 옮김, 개혁주의신학사(P&R), 2012, pp. 55~57, 81~85.
「재난 재해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재난 재해 진단1」 자연주의의 덫에 걸린 현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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