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 강해
(17)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Geneva Reformed Church 제네바 개혁교회
Reformed Guardian 리폼드 가디언
The Band of Puritans 밴드 오브 퓨리탄스
Geneva Institute 제네바 신학교
오인용 목사
다 함께, 히브리서 2장 14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 2:14)」 아멘.
오늘 배울 소요리문답 제22문의 내용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입니다. 소요리문답 제22문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인간이 되셨는가?”라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답하기 매우 어렵지만, 참으로 중요합니다. 중세 신학자 중에는 이 질문에 아주 깊이 있는 답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청교도와 종교개혁자들은 이 질문에 무엇이라고 답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의 자궁에 잉태됨으로써 참된 육체와 이성적인 영혼을 취하여 인간이 되사 마리아에게서 출생하시되 죄는 없으시다.”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압축적인 답입니다. 그러나 이 짧고 압축적인 대답 안에는 성경적, 교리적, 신학적으로 설명해야 할 내용이 참으로 많습니다.
먼저,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부분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성육신 교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일반적인 생육법이 아닌,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출생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이 사실을 조금 더 분명하게 설명하는 문구가 바로 “동정녀 마리아의 자궁에 잉태됨으로써”입니다.
여러분, 남자를 알지 못하는 동정녀가 아이를 가질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동정녀의 태 속에서 잉태되신 것입니까?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이 예수님의 출생 과정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꼬치꼬치 따져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해봐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더구나 성경은 이 부분을 우리에게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가 사람의 이해능력을 벗어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관련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일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철학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말 그대로 신앙입니다. 성경의 가르침 가운데는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보다도 있는 그대로 믿어야 하는 내용이 더 많습니다. 그렇게 기록된 그대로 믿어야 하는 교리 중에 대표적인 게 바로 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교리입니다.
물론, 세상의 불신자들은 이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동정녀에게서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느냐? 거짓말을 해도 정도껏 해야지, 말이 안 되도 너무 안 되지 않느냐?”라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황당한 거짓말을 믿는 상식 이하의 종교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상식 이하의 거짓말처럼 보이는 그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누가복음 1장 35절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사실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여러분, 성경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난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가능한 일이 바로 기적입니다(마 19:26). 하나님께서는 원하시기만 한다면 동정녀 탄생보다도 더 불가능한 방식, 예를 들면 돌멩이가 예수님을 잉태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도 그 일을 할 수 있으십니다(마 3:9).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보내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하셨던 그대로, 예수님을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게 하셨던 것입니다(창 3:15). 그렇게 하셔서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 인류의 계보를 따르게 하시면서도, 아담의 죄는 물려받지 않게 하셨습니다(눅 3:28). 이처럼,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이들은, 그들의 알량한 지혜와 이성을 가지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멸시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신화이다.”라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어리석은 철학이 아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가르쳐주신 그분의 지혜와 사랑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하셔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기에 참 사람이자 참 하나님이시며, 죄 없는 분이실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참된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면서도 동정녀 마리아라는 사람 자체를 절대로 특별대우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은 우리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로마 카톨릭 교회는 동정녀 마리아를 아주 특별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보다 마리아에게 더 집중하면서 그녀를 사실상 신격화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만들어내는 모자상(母子像)을 보십시오. 그 형상의 주인공은 마리아이지, 예수님이 절대 아닙니다. 원숙한 어른인 마리아는 온화한 미소를 띠고서 힘없고 연약한 아기인 예수님을 보호하듯 품에 안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도 큰 범죄이지만, 예수님을 아기로 묘사한 형상을 만드는 것은 더 심한 죄악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지혜와 키가 자랐다고 기록합니다(눅 2:52). 보호와 돌봄이 필요했던 아기로 계속 이 땅에 계셨던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아기로 표현하면서 그를 돌보는 마리아의 모습을 부각시키는 행위는 예수님을 우습게 여기는 범죄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이, 모자상은 모자 숭배로 유명했던 고대 바빌로니아의 이교 관습과 연계된 것이기도 합니다. 바빌로니아의 모자 숭배 사상은 이집트를 거쳐 중근동 지역에 널리 퍼졌고, 그 이교 사상이 다시 로마 카톨릭 교회 안으로 들어와 자리잡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이런 우상 숭배를 멀리하고 배격해야 합니다.
더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경이 전혀 가르치지 않는 마리아에 관한 거짓 교리도 가르칩니다. 그들은 마리아가 원죄 없이 태어났고(무염시태, 無染始胎), 평생 동정녀로 살았으며, 숨을 거두자마자 부활하여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고(몽소승천, 蒙召昇天) 가르칩니다. 그 마리아가 지금도 예수님 옆에서 신자들을 중보한다고 하면서 그녀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신자들이 성당 안에 있는 마리아 상(像) 앞에서 ‘공경’을 표하며 그녀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녀의 은총과 중보가 없었다면 어떻게 할 뻔 했을까?’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어디에서도 마리아를 그렇게 떠받들고 의뢰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녀가 예수님을 낳은 뒤, 여러 자녀를 낳으면서 평범한 여인으로서 살았다고 말합니다(요 7:5).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 사실을 부정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예수님의 형제는 마리아가 낳은 친동생이 아니라 ‘사촌 동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리스어 원문을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용법상, 그 단어는 말 그대로 ‘형제’를 뜻하지 ‘사촌 동생’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 외에도 마리아가 평범한 여인으로 살아가면서 자녀를 낳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구절은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마태복음 1장 25절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라는 부분이 대표적입니다. 이 말씀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뒤로는 동정녀로 지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마리아가 평범한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요한에게 “보라, 이 여인은 죄 없이 태어났고 평생 동정녀로 살 사람이며, 장차 승천할 하늘의 여왕이라.”라고 하셨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7).”라고 하시면서 그녀를 친어머니 모시듯이 잘 돌봐달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 베드로, 요한 사도의 편지에서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것처럼 마리아를 ‘공경’해야 한다고 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특별한 능력도, 교회를 세우는 소명도, 하늘의 여왕 지위도 받지 않은, 정말 평범한 한 사람의 신자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정통 기독교 신앙은 우리를 위해 참 사람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지, 그 일을 이루는 통로로 쓰임 받은 일개 사람을 특별대우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원래 오직 그리스도로 시작해서 오직 그리스도로 끝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감히 ‘하늘의 여왕 마리아’가 끼어들 만한 자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제, “참된 육체와 이성적인 영혼을 취하여 인간이 되사”라는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인성을 취한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거나, 인성의 일부만 취하여 ‘반인반신(半人半神)’과 같은 존재가 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정통 기독교는 예수님께서 완전한 인간이시자,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가르칩니다.
다시 말해, 정통 기독교가 믿는 예수님은 신인양성(神人兩性)을 지닌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온전한 인성과 신성을 모두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둘 중에 하나라도 부인하거나 훼손하는 이들은 가까이하지 말고 멀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온전한 인성과 신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대표적인 분파로는, 유티케스주의를 따르는 에티오피아의 콥틱 교회와 네스토리우스주의를 따르는 고대 중국의 경교(景敎)가 있습니다. 이들은 기독교라는 범주 안에서 함께 거론되곤 하지만 실상은 이단입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예수님의 인성을 훼손하고, 후자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하여 예수님을 이중인격자처럼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인성과 신성을 지닌 신인(神人, God-man)으로 이 땅을 살아가셨고, 고난 받으셨으며, 승천하셨습니다.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중보해주십니다. 이 일은 오직 예수님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 외에는 온전한 인성과 신성을 지닌 존재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요리문답 제38, 39, 40문은 이 사실을 참으로 잘 설명해줍니다. 먼저, 제38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제38문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왜 중보자가 반드시 하나님이셔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중보자가 하나님이셔야만 한다는 것은 그의 인성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진노와 죽음의 능력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유지하고 지켜야 하였으며, 그의 고난과 순종과 중재적인 간구에 효력과 가치를 부여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게 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얻고, 한 특별한 백성을 구속하여 저희에게 성령을 주시며, 저희 모든 원수들을 정복하고, 저희를 영원한 구원에 이르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분, 우리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 왜 하나님이셔야만 합니까? 우리를 중보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우리를 건져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지었으므로,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천사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중보해줄 수 있습니까? 과연, 천사가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수 있을 만큼 완전하게 그분의 공의를 이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중보자는 반드시 하나님 그분 자신이셔야만 합니다.
또한, 대요리문답 제39문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중보자가 왜 사람이셔야만 했는가?”
그 질문에는 이렇게 답합니다. “중보자가 사람이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우리의 성질을 인양하고 율법에 순종하여 고난을 받고 우리의 성질을 가지고 우리를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이어야 하며, 또 우리가 양자됨을 얻고 위로를 받으며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것이 필수적이다.”
쉽게 말해, 첫째 아담이 범죄했기 때문에, 그 첫째 아담을 대신할 둘째 아담도 온전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인성을 지닌 둘째 아담이 모든 시험을 이겨내고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러줘야만,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하게 됩니다. 만약, 예수님의 인성이 어딘가 모자라고 흠이 있다면, 우리의 구원도 어딘가 모자라고 흠이 있는 게 되고 맙니다.
마지막으로, 대요리문답 제40문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중보자는 왜 한 인격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어야 했는가?”
이 질문은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할 중보자는 그 자신이 하나님과 인간이어야 하며 이것이 한 인격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며, 우리를 위한 신성과 인성의 각기 고유한 일들이 하나님이 받으신 바 되어야 하고, 전 인격적인 사역으로서 우리가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분, 예수님의 두 본성을 별개 인격으로 분리하는 네스토리우스주의가 왜 이단입니까? 우리가 그분의 대속 사역을 온전히 믿고 의뢰하는 일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그분의 사역을 믿고 의뢰한다고 해도, 서로 분리되어 있는 그분의 두 인격만큼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서로 분리되고 떨어진 채 영원히 가까워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두 본성이 한 인격 안에서 서로 섞이지는 않았으나, 온전히 연합한 상태에서 대속과 중보 사역을 감당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 신인양성 교리는 복음의 핵심 중에 핵심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지금까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 중에 어느 한 쪽이라도 부인하는 이들이 나타나면, 그들을 단호하게 쫓아냈던 것입니다.
교회 역사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과 다투고 그들을 교회에서 쫓아낸 사건으로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셨을 때나,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나, 부활하고 승천하셨을 때나 온전한 인성과 신성을 한 인격 안에 지니고 계셨습니다. 이 정통 교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분명히 이단입니다.
또한, 우리는 마리아를 숭배하며 그녀에게 집중하게 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거짓 가르침도 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보하는 분은 참 사람이며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지, 자애로운 하늘의 여왕 마리아가 아닙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가르치는 마리아 교리는 모두 성경이 아닌, 그들의 전통과 관습에 근거해 있습니다.
그런데도 로마 카톨릭 교인들은 ‘이것이 참 믿음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사람이 만들어낸 전통에 근거한 믿음이 참 믿음이라면, 기독교 신앙만 참 진리이고 올바른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유일한 진리이고 참 신앙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고 확증해주신 그분의 말씀, 곧 성경에 근거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로마 카톨릭 교회가 가르치며 권장하는 마리아 신앙이 명백한 우상숭배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숭모(崇母) 신앙이 얼마나 반(反) 복음적인 사상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 역할을 하는 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숭모 신앙은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서 엄청난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신앙이 무너진다면, 로마 카톨릭 교회도 함께 무너져 내릴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합니다.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이 더러운 우상 숭배를 계속 하라고 가르치며 권장할 것입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마리아 때문에, 수많은 영혼이 복음과 구원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다가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그 안에 있는 모두가 영원히 심판 받고 멸망할 것입니다.
여러분, 로마 카톨릭 교회가 얼마나 위험하고 끔찍한 집단인지 정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통 기독교 신앙은 엄청난 혼란에 빠집니다. 보십시오, 한국 교회는 이미 로마 카톨릭 교회와 하나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예, 대놓고 신앙과 직제를 통일하자고 하면서 그 일을 수행할 기구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여러분, 이는 명백한 영적 간음입니다. 한국 교회는 우상과 함께 갈 데까지 가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악한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도록 주의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도 이러한 로마 카톨릭의 오류와 위험성을 정확하게 알려주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절대로 거짓 교리에 오염되어 생명의 길에서 탈선하지 않도록 말씀과 기도로 잘 보호하시기를 바랍니다.
* 소요리문답 강해 설교 시리즈에는 녹음이 되지 않아 누락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강론은 교리학교용 소요리문답 강의로 대신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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