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 강해
(14) 죄의 결과와 비참함
Geneva Reformed Church 제네바 개혁교회
Reformed Guardian 리폼드 가디언
The Band of Puritans 밴드 오브 퓨리탄스
Geneva Institute 제네바 신학교
오인용 목사
다 함께 마태복음 25장 41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아멘.
오늘은 소요리문답 제19문, ‘죄의 결과와 비참함’을 설교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왼편에 있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모든 불신자를 말합니다. 여러분은 불신자들이 이 말씀을 싫어해도, 이 말씀 증거하기를 두려워하거나 회피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감정과 느낌을 중시하는 현대 문화에 사로잡힌 오늘날 교회에는 죄로 인해 진노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증거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떨기보다는 자기감정을 어루만져주고 기호를 충족시켜주는 일에 하나님을 동원하려는 듯한 일이 빈번합니다.
현대 교회 예배당은 이런 경향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강단인지 공연 무대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단상 위로는 오색찬란한 조명 빛이 쏟아지고, 그 옆으로는 모든 것을 잘 감상하게 하려는 듯한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으며, 관중석인지 회중석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의자는 회중이 예배를 잘 ‘즐기다가’ 돌아갈 수 있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배당 한쪽에는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카페와 풍족한 문화생활을 누리기 위한 부대 시설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현대 교회 예배당을 보고 있으면, “교회는 당신의 영혼과 영적인 복락을 가볍게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영생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누리는 안락함입니다.”라고 말하는 광고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 누가 교회에 나와서 ‘아, 이곳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엄숙하게 예배와 기도를 드리겠습니까? 과연, 누가 진지하고 신중하게 진리를 배우고 자기 영혼의 상태를 심도 있게 살펴보려고 하겠습니까?
여러분, 교회는 제멋대로 행동해도 되는 가벼운 곳이 전혀 아닙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것조차도 농담거리로 삼고 즐기며 기분을 푸는 현대 문화를 절대로 좇지 마십시오. 여러분 주변의 불신자가 조롱하며 시험을 걸어온다고 해도 넘어지지 마십시오. 영적인 문제는 이 세상 어느 것보다도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줘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성경은 세상 끝날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며,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뉘리라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사람은 의인(義人)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악인(惡人)으로 분류될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하지만, 이 세상은 선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을 의인이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 가까이에 있는 석촌 호수 산책길에는 의인 기념비 여럿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 기념비를 보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려고 자기 생명을 던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예수님을 믿지 않은 채 죽었다면 악인으로 판명 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주님, 저는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받은 죄인입니다. 저를 긍휼히 여겨주소서.”라고 정직하게 고백하며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해야 합니다. 괜히 의로운 체해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죄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진노하시며, 타락한 사람도 그런 하나님을 미워하고 대적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자연인은 원수이며, 둘 사이에는 불화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너무 좋게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연민의 눈길로 바라보며 애태우신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도 자기가 하나님에게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더 의뢰하는 이들에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진노하십니다. 세상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은혜를 달라고 하느니, 차라리 영원한 지옥에 가겠다고 고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요단강을 건너오는 순간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 넣으려고 단단히 벼르고 계시며, 세상 사람도 영원한 심판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더욱 고개를 빳빳이 치켜세웁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이런 죄인을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 하늘의 태양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것보다 몇만 배는 더 격렬하게 그들에게 진노하십니다. 그들의 귀에 들려줘야 하는 하나님 말씀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들』이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죄인들에게 크게 진노하시며, 장차 그 죄악을 심판하시리라는 사실은 우리 실생활 가운데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무엇보다도 세상 모든 사람이 죽음을 맞는다는 사실에서 가장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에덴동산에 두셨을 때, 이 세상에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음으로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으며,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조금 전 오전 예배 때 설교한 창세기 5장의 내용을 한번 기억해 보십시오. 홍수가 나기 전에 몇백 년씩 살았던 사람들도 결국에는 다 죽음을 맞았습니다. 창세기 5장에는 ‘죽었다’는 단어가 무려 여덟 번이나 나타납니다.
또한, 이 사실은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겪어야만 하는 다양한 질병과 고통, 심적 공허함 등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텔레비전을 틀면, 참 예쁘고 잘 생긴 연예인들이 즐겁게 살아가고 있는 듯한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누는 대화나 짓는 표정을 유심히 살펴보면 속으로는 상당히 공허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수십 년을 많은 재물과 높은 인기를 자랑하며 남 부러울 것 없이 사는 것만 같았던 그들도, 알고 보면 남은 게 아무것도 없는 실상을 언뜻언뜻 자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들 가운데 ‘궁극적인 안식과 참 평안’을 노래하며 즐거워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누군가 아무리 예쁘고 돈이 많으며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해도,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면 조금도 그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의 교만과 허영이 그 공허한 심령을 짓눌러 파괴하기까지 그에게 진노하십니다.
그런 상태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과연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오, 네가 어쩌다 그렇게 생을 마쳤느냐? 내가 이번만큼은 너를 불쌍히 여겨서 그냥 넘어가 줄 테니, 천국으로 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라.”라고 하시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또, 46절에는 무엇이라고 나와 있습니까?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그들은 ‘영원한 불’, 곧 ‘영원한 벌’을 받게 됩니다. 빌 게이츠처럼 자선을 많이 행한 사람도, 테레사 수녀처럼 자선을 미끼로 종교 사업을 펼친 사람도,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지 않았다면 다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불신자가 직면해 있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들은 이 엄중한 사실을 듣고 깨달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 안에는 참 다양한 방법으로 이 명백한 사실을 흐릿하게 하려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누가 봐도 명백한 이 사실을 몇 가지 문학 기법을 동원하여 교묘하게 부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늘어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신 것뿐이다. 영원한 지옥 불이란 실재하지 않는다. 영벌이라는 표현도 그만큼 지옥 형벌이 중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시려고 과장법을 사용하신 것이지, 실제로 벌이 영원하다는 뜻은 아니다.”
저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참 답답합니다. 저들 말대로 예수님께서 존재하지도 않는 ‘영원한 불’, 곧 ‘영원한 벌’을 말씀하시며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하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거의 공갈, 협박하신 것과 다름없어 지고 맙니다. 있는 대로 겁을 줘서 자기를 믿고 따르게 하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행동하신 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상징적인 표현도, 예화도, 모형이나 예표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어떤 표현인지는 문맥에 비추어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면서 판단해야지, 본인의 기호나 선입견을 따라 자의적으로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반드시 본래 내용 그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이 보기 좋고 듣기 좋은 대로 해석하고 기준을 조정하면, 꼭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 주변의 믿지 않는 사람에게 성경이 말하는 내용을 가감해서 증거하지 말고 원래 내용 그대로 알려주십시오. 이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거짓 없는 사랑도 본래 내용 그대로 증거하시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향한 그분의 끝없는 진노도 그대로 전하십시오.
타락한 사람의 마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복음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끝까지 대항합니다. 그들의 강퍅한 심령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할 때는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거룩하심도 꼭 있는 그대로 함께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야 강퍅한 마음이 깨어져 자기 악함을 깨닫고,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진노하고 그들에게 영벌을 내리는 분이시라면, 천주교에서 말하는 연옥이나 안식교의 영혼 소멸 교리, 그리고 불교나 힌두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없다는 사실이 명확해집니다. 실제로 성경은 이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주 분명하게 확증해줍니다. 우리 다 함께 히브리서 9장 2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에 참 감사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아멘.
이 말씀은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신 분들이라면 아마 한 번쯤은 읽어보셨을 겁니다. 이 말씀에는 죄의 결과와 그 비참함이 참으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지, ‘연옥’이나 ‘영혼의 소멸’, 또는 ‘윤회’가 있으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죽은 사람이 자기 영혼을 정화하기 위해 일정 기간 머무는 공간인 연옥이라는 개념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고대 유럽인들 사이에 존재했던 연옥 개념이 중세를 거치며 사변적인 로마 카톨릭 신학에 흡수되어 교리화 한 결과물이 바로 오늘날 천주교인이 믿는 연옥입니다.
안식교에서 가르치는 영혼 소멸의 교리도 그렇습니다. 정말로 죄 가운데 죽은 사람이 일정 기간 지옥에서 벌을 받은 뒤에 소멸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영원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영원한 진노와 벌을 받을 대상이 소멸해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어 버리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이 되지 않겠습니까?
영혼 소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람들은 아예,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 지옥 형벌을 내리신 다음 그들을 건져내어 천국으로 이끄신다는 참으로 해괴망측한 만인 구원론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혼 소멸설이나 만인 구원론이나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부인하는 이단적인 가르침이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죽은 사람이 계속 환생한다는 윤회도 똑같습니다. 어떻게 죄 가운데 죽은 사람이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와 심판을 피해 새 생명을 얻어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한 번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성경 말씀은 거짓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은 분명한 이 사실보다 최면술사의 말을 더 신뢰하는 듯합니다. 요즘에는 조금 덜해졌지만, 5~8년 전만 하더라도 출연자의 전생을 알아보는 텔레비전 방송이 꽤 많았습니다. 최면술사가 최면을 걸면 출연자들은 자기가 전생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곤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윤회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자기 전생이 별 볼 일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윤회가 사실이라면, 거지나 산적으로 살았던 사람도 어느 정도는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왕자, 공주로 살았다는 사람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만약 제가 사후 세계에 관심이 많은 불신자였다면, 저는 분명히 성경 말씀을 따르는 쪽을 선택했을 것 같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죽음 이후에 성경 말씀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면 연옥, 영혼 소멸, 윤회 따위를 통해 영벌을 피할 방법이 남아 있지만, 그 반대는 아무런 소망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가 죽은 뒤에 받게 되는 영벌에 관해서는 요한계시록이 가장 잘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 함께 요한계시록 14장 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아멘.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라는 이 말씀은 정말 있는 그대로를 묘사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영해(靈解)하거나 상징으로 해석하여, 실제로는 이런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하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장차 있을 영원한 벌이 어떠할지를 실제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21장 8절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증거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교회는 최후 심판에 관한 말씀을 거듭나지 못한 육적 그리스도인, 곧 거짓 그리스도인에게 자주 들려줘야 합니다. 절대로 그들에게 “당신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이며, 천국 백성입니다.”라고 위로하는 말씀을 들려주면 안 됩니다. 심판의 말씀을 명백하게 들려줘야, 그들도 심령에 경고를 받고 회개할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불신자가 받을 영벌 외에도, 신자가 누릴 영생과 유업으로 받을 천국에 관한 내용도 많이 나옵니다. 다 함께 요한계시록 21장 1~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아멘.
참으로 주님을 믿는 우리 성도가 영원히 살아갈 천국에는 ‘눈물’과 ‘사망’과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습니다. 아담의 범죄로 세상에 들어온 이 모든 것은 다 지나가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주변에 불치병으로 고통받으며 사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에게 꼭 이 말씀을 들려주며 전도하십시오. 그렇게 하면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죽음은 두렵고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죽으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이렇게 좋은 곳으로 인도해주십니다.”라고 말씀해주십시오.
우리가 거할 이 천국에 관해 알려주고 있는 성경 구절을 하나 더 찾아보겠습니다. 다 같이 요한계시록 22장 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아멘.
여러분, 얼마나 좋습니까? 용서받은 죄인, 곧 의인은 이처럼 아름답고 좋은 곳에서 영생을 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은혜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천국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신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쓸데없는 천국 간증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 이상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다른 영의 미혹을 받게 되기 쉽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영생에, 악인은 영벌에 들어가리라고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믿음을 따라 고난과 환난과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살다가 천국에 가기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땅에서 사는 백 년 남짓한 기간 동안 날마다 즐겁고 행복하며 건강하게 살다가 지옥에 가기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사람 대부분은 후자를 택합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리기보다는, 이 땅에서 자기를 즐겁게 하는 것을 전부 맛보고 누리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결코 소망이 없습니다.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도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절대로 지옥 형벌을 피하지 못합니다. 이 기준을 조금이라도 내리면 안 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 지옥에 간다고 단언하시는 것은 좀 지나친 게 아닙니까? 그래도 신앙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간 사람일 텐데요. 그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셔야 하는 게 아닌지요?”
물론, 마지막 판단과 판결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사실을 인정하는 가운데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는 참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도 분명하게 말씀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영생에 대한 소망을 따라 이 세상의 유혹을 반드시 끊고 돌아서게 된다는 사실을 그렇게 가볍게 생각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누군가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도 평생 이 세상을 마음에 품고 살았다면, 어떻게 그가 지옥 형벌을 피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눅 17:31, 32)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분명한 기준을 사람이 함부로 낮추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처음에도 말씀드렸지만, 사람의 영혼에 관한 문제를 절대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엄숙하고 진지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주신 이 엄중한 말씀을 가볍게 여기며 웃음거리로 삼거나, 기준을 낮추어 사람의 기분을 편안하게 하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누구에게 증거하시든지 정직하고 진실하며 진지하게 하셔야 합니다. 바울이 벨릭스에게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 증거하자, 벨릭스는 총독임에도 두려워하며 벌벌 떨었습니다(행 24:25). 정말 예수님의 제자라면 복음은 그렇게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죄의 결과와 비참함은 무엇입니까? 영벌, 즉 영원한 지옥입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윤회도, 중간 지대도, 영혼 소멸도 없습니다. 오직 천국과 지옥만 존재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누릴 자로 선택받은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십시오. 혹여, 그 영생에 대한 소망으로 인해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다 잃고 포기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의뢰하는 참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한 주간 1 명, 총 1,437이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