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박물관 탐방기 – 칼빈과 기독교 강요」 시리즈
칼빈 박물관 탐방기 (3-1) 칼빈과 기독교 강요 – 제가 이 책을 지은 것은 종교에 열심 있는 사람이 참된 경건의 생활을 하게 하는 것과 귀중한 죽음으로 생을 마친 내 형제들을 변호하려는 것입니다
칼빈 박물관 탐방기 (3-2) 칼빈과 기독교 강요 – 『기독교 강요』,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성경의 가르침 전반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걸작품
김수용
여러분은 ‘존 칼빈’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그분을 알게 된 계기는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소개해드릴 그분의 책, 『기독교 강요』를 통해 칼빈 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선 글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부모님을 따라 어릴 때부터 성당에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20대 중반에 이르러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천주교를 떠나 처음으로 출석한 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때 제 상태는 개신교 신학과 신앙을 궁금해하는 정도였을 뿐, 실제로 아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다닌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돌아오는 주일에 성찬식을 할 예정이니 준비하라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동안 천주교의 성체성사에만 참여했던 저는, 그렇게 개신교 성찬식에 생애 처음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생겼습니다. 목사님께서 제게 천주교의 영세는 세례로 인정받을 수 없으니, 이번 성찬식에는 참여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일정한 교육을 받은 다음에 세례를 새로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날, 성찬식에 결국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제 마음 안에서는 아주 복잡한 감정이 솟구쳤습니다. 대체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당황스러움이 조금 누그러지자 자존심이 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천주교회를 큰 집, 개신교회를 작은 집이라고 부르며 개신교인을 형제·자매로서 친근하게 대하는데, 개신교에서는 천주교를 왜 이렇게 대하는지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뭔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서러움이 차오르더니, 이내 굵은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런 저의 모습을 지켜보던 어떤 분께서 참 감사하게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공부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해주셨습니다. 그분과 교리문답 공부를 마칠 즈음, 여러 가지 이유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잠시 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결 시간 여유도 많아졌는데, 그때 마침 『기독교 강요』를 공부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저는 바로 그때, ‘존 칼빈’과 그분이 지은 『기독교 강요』를 알게 되었습니다. 칼빈 박물관을 처음 방문했던 4년 전, 저는 『기독교 강요』 초반부를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강요’라는 말이 들리면 괜스레 반갑고 즐거웠습니다.
이번 편과 다음 편에서는 제가 칼빈 선생님을 알게 된 통로 역할을 한 『기독교 강요』를 여러분께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어떤 책이든지 그 책에는 저자가 하고 싶은 말과 그 말을 하게 된 동기와 배경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편에서는 칼빈 박물관의 자료와 더불어, 칼빈 선생님이 어떤 환경 가운데 무슨 동기로 이 책을 지었는지 조금이나마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 편에서는 『기독교 강요』의 구성과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칼빈과 기독교 강요 (1)
–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집필한 동기와 목적
집필 동기와 목적을 소개하기에 앞서, 『기독교 강요』라는 책 제목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강요』라는 책 제목이, 처음 들으신 분에게는 그 말이 상당히 당혹스럽게 느껴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여기서 사용하는 ‘강요’의 의미는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뜻과 다를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기독교를 강요하는 책일 것이라는 인상이 계속 제 마음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당시 개신교에 대한 반감이 약간 남아있었던 저로서는 책 제목이 불쾌하게 느껴지기까지도 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강요(綱要)’는 무언가를 강요(强要)한다는 뜻이 아닌, 으뜸 줄기가 될 만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즉, 기독교의 으뜸 줄기가 될 만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정리해놓은 책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본래 책 제목(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을 살펴보면, 강요와 상응하는 단어가 ‘인스티투티오(institutio)’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라틴어 ‘인스티투티오’는 영어의 ‘인스트럭션(instruction)’과 같은 의미를 지닌 단어로서, 여기에서는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칼빈 선생님은 기독교를 강요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무엇을 가르치는지 설명하려고 했다는 의미로 책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것입니다.2
그렇다면 칼빈 선생님은 왜 이렇게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책을 지은 것일까요? 그 이유는 『기독교 강요』 첫머리에 ‘헌사’로 실린,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납니다. 칼빈 선생님은 그 편지에서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게 된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말합니다.
「저의 의도는 다만 몇 가지 기초적인 원리들을 기술하여, 종교에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 참된 경건의 생활을 이루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특별히 나의 동포 프랑스 사람들을 위하여 저술하였는데,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주리고 목마른 듯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있으나 그리스도에 대한 적은 지식마저도 바로 터득한 자가 매우 적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붓을 들게 된 의도라는 것이 이 책 자체가 증명하는 것처럼 그 내용이 단순하고 기초적인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3
우선, 칼빈 선생님은 종교에 열심 있는 사람들, 특별히 자신의 동포인 프랑스 사람들의 믿음을 돕기 위해 기초적인 신학 지식을 제공하려는 것이 본래 의도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 책의 내용과 형식이 복잡한 논증이나 화려한 수사법으로 채워져 있지 않고, 단순하고 기초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그런 다음, 칼빈 선생님은 책을 저술한 이유를 하나 더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악한 자들의 광포가 극도에 달하여 폐하의 나라에서 건전한 교리가 발붙일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책으로 저들을 가르치고 나의 신앙고백을 폐하께 보여 드릴 수 있다면, 이것으로 나는 보람 있는 일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4
칼빈 선생님은 프랑스에서 어떤 사악한 자들의 광포가 극에 달하여 건전한 신앙을 가진 이들이 부당한 모함과 박해를 받고 있어서, 프랑수아 1세에게 자신과 같은 신앙을 지닌 이들의 신앙고백이 어떠한지 알려드리려고 책을 썼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칼빈 선생님이 말한 어떤 ‘사악한 자들’은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또, 그들은 어떤 이유로 건전한 신자(信者)를 모함하고 박해했던 것일까요?
▲ 칼빈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기독교 강요』 초판(1536년)과 최종판(1559년)
– 직접 사진을 찍지 못해서 박물관 안내지에 실린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칼빈과 기독교 강요 (2)
–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집필하게 된 역사적 배경
앞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칼빈 선생님의 시편 주석 서문에 잘 나타납니다. 칼빈 선생님은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행동을 극도로 삼갔습니다. 그러나 시편 주석 서문에는 참으로 보기 드문 그분의 자전적 진술이 나옵니다.
「만약 내가 내 모든 능력을 다하여 그들(날조된 주장을 하는 자들)을 대적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면 이러한 침묵은 비겁과 변절에 해당한다는 비난을 받게 될 때 대답할 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이런 생각이 나로 하여금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의도했던 바는 먼저 이런 소문이야말로 허위이고 중상모략에 해당함을 입증해 냄으로써 주님 앞에서 귀중한 죽음으로 생을 마친 내 형제들의 정당함을 변호하는 것입니다.」5
칼빈 선생님은 이 책에서 어떤 사람들이 신앙을 지키려다가 순교한 이들을 깎아내리는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순교자들과 같은 신앙을 지니고 있었던 칼빈 선생님은 그런 일에 대해 침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거짓된 중상모략인지를 『기독교 강요』를 통해 입증하여, 목숨을 잃고 부당한 비난을 받는 형제들을 변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 당시 프랑스 개신교도는 큰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칼빈 선생님 역시 가명을 사용하기도 하면서 망명자 신세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칼빈 선생님이 서둘러 『기독교 강요』를 저술할 수밖에 없었던 큰 사건이 프랑스에서 일어났습니다. 1534년 10월 17일 밤, 프랑스 파리 시내 곳곳에는 벽보 하나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느카텔 교회의 목사 앙트완 마르쿠르(Antoine Marcourt)가 작성한 이 벽보는 심지어 왕의 침실 문에까지 붙어 있을 정도로 파리 시 전역을 뒤덮었습니다. 그 벽보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유일하신 중보자시요, 구세주이신 우리 주님의 그 거룩한 성찬을 직접 반대하여 만들어진 교황주의 미사의 그 무섭고 용납할 수 없는 남용에 대하여」6
또한, 벽보의 한 대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온 천지에 호소하여, 이 무섭고 거만한 교황주의 미사를 대항하여 진리로 증거해 주기를 원한다. 이 미사로 인해서 세계는, 만일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시지 않는다면, 현재도 그러려니와 전적으로 황폐해지고 파산되며 파멸되어 마침내는 우리 주님께서 이 미사로 인하여 잔인한 모독을 받으며, 사람들은 이 미사에 속아 그 눈이 어두워지게 될 것이다. …(중략)…」7
즉, 이 벽보는 로마 카톨릭의 미사를 우상숭배로 규정하고 철폐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벽보의 내용을 살펴본 프랑수아 1세는 격노(激怒)했습니다. 안 그래도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에서 강하게 일고 있던 종교개혁 운동을 국가와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적인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이단을 숙청하여 나라와 교회를 수호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카톨릭 세력은 프랑스 복음주의자를 국가 권력과 질서에 대항하는 극단적인 재세례파나 무식한 오합지졸로 몰아붙였습니다. 다시 말해, 종교개혁을 정부 전복을 획책하는 광적인 반역 운동으로 몰아 핍박을 정당화하려고 한 것입니다.8
결국, 이 벽보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은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런 다음, 프랑수아 1세는 1535년 2월 1일에 열린 프랑스 제국 의회에서 이들에 대한 핍박이 정당하다고 공포(公布)하였습니다. 또한, 카톨릭 세력은 거짓된 내용을 담은 소책자를 유포하여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도 했습니다. 그 소책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잔인한 처형은 재세례파와 선동자들에 대해서만 가해진 것이요, 그들이 이와 같은 처형을 받은 것은 헛되고 거짓된 생각으로 종교뿐만 아니라 일체의 정치적 질서까지도 전복하려 했기 때문이다.」9
그렇게 무고하게 생명을 잃은 사람들 가운데는 칼빈 선생님의 친구, 지인, 동료, 친형제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칼빈 선생님은 그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했습니다. 프랑수아 1세에게는 그들이 국가 질서를 어지럽히고 혼란에 빠트리는 자들과 같았을지 몰라도, 칼빈 선생님에게는 기독교 진리를 위해 순교한 ‘신실하고 거룩한 사람들10’이었기 때문입니다.
칼빈 선생님은 1535년 8월 23일, 프랑수아 1세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동료 개혁자들이 이단과 선동의 주역으로 취급받는 일이 부당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개인적인 이유로 이들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와 관련된 일, 곧 그리스도 그분 자신과 관련된 일을 붙들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다음, 순교한 이들의 신앙고백이 어떠한지 살펴달라고 호소하고, 개신교 운동이 정통적이며 질서를 흐트러뜨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노력합니다. 칼빈 선생님이 이 편지를 보낸 지 약 8개월 뒤인 1536년 4월, 스위스 바젤에서는 이 편지가 헌사로 실린 『기독교 강요』가 출간되었습니다. 참 놀랍게도 이 책이 세상에 나올 당시, 칼빈 선생님의 나이는 아직 약관(弱冠)에 불과한 27세였습니다.
과연, 이 헌사를 프랑수아 1세가 읽었는지 아닌지는 신학자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칼빈 선생님은 이 헌사가 『기독교 강요』의 본질과 내용을 가장 잘 대변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이 헌사는 조금 수정되기는 했지만, 초판(1536년)부터 최종판(1559년)까지 항상 서문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11오늘날에는 많은 이들이 읽지 않고 그냥 건너뛰어 버리는 헌사이지만, 칼빈 선생님은 헌사에 기록한 내용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 『기독교 강요』 초판본을 전사(轉寫)한 필름이 담겨 있는 상자12
이처럼 칼빈 선생님은 무지한 프랑스 동포와 박해받는 성도를 위해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성경의 가르침)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사실은 오늘날의 상황이 칼빈 선생님이 펜을 들어야 했던 때와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반(反)기독교적인 사상과 이념, 동성애와 이슬람 세력 등이 아주 빠른 속도로 우리 사회에 스며들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대항하려면, 많은 비난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상황의 심각성을 거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듣기에 좋은 말로 사람들을 위로하며 마음을 가볍게 하는 데 깊이 빠져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강요』는 시대와 환경을 가리지 않고, 성도들에게 항상 유익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그러나 공공연하게 교회를 멸시하는 우리 시대의 성도들에게 특히 더 많은 유익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간혹,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성경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이런 책들을 공부해야 하느냐?”
물론, 성경은 그 자체로 완전하고 보탤 것이 전혀 없는 책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어리석고 무지하며, 죄로 인해 명백한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왜곡하여 받아들일 가능성이 상당합니다. 그래서 누군가 성경의 가르침을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는 옛 속담과 같은 상황에 쉽게 빠질 수 있습니다.
저만 해도, 교회에 첫발을 들이고 성찬식에 참석했을 때는 천주교의 하느님과 개신교의 하나님이 왜 다른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무지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만약 『기독교 강요』와 같은 책을 배우지 않았다면, 성경이 종교 통합을 지지한다는 얼토당토않은 결론에 이르렀을지도 모릅니다.
믿음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확고하고 신뢰할 만한 근거 위에서 자라고 강해집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왜 믿어야 하는지를 배우고 이해해야만, 불신의 비바람과 속임의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세상 속에서도 믿음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습니다.
『기독교 강요』와 같은 책 안에는 우리보다 앞선 신앙의 선배가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믿고 의지해 세상과 싸워 이겼는지가 잘 녹아 들어가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내용이 신자에게 유익하다는 사실은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의 실제 삶 속에서 검증에 검증, 확인에 재확인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더 깊이 있고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 이러한 책을 적극적으로 잘 활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책을 우리 시대에 난무하는 온갖 어둠의 일들을 분별하고 멀리하는 데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기독교 강요의 구조와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서, ‘칼빈과 기독교 강요’라는 두 번째 주제를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각주
1 가장 윗줄의 왼쪽 첫 번째 책은 『기독교 강요』 초판본(1536년)을 전사(轉寫)하여 필름으로 만든 다음 새로 인쇄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줄의 왼쪽 두 번째 책은 1570년대에 영국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대학교 등에서 교과서로 사용한 『기독교 강요』입니다. 당시, 영국 대학교에서는 『기독교 강요』를 모든 학문의 공통과목으로서 가르쳤습니다. 예장 제작, 「정성구 박사와 함께 하는 칼빈 박물관 탐방」(https://youtu.be/mjiRMd0YGfU)
2 데이비드 W. 홀 외 1명 엮음, 『칼빈의 기독교 강요 신학』, 나용화 외 다수 옮김, P&R, 2009, p. 30 참조.
3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 김종흡 외 3명 옮김, 생명의말씀사, 1988, 생명의말씀사, p. 41.
4 같은 책, pp. 41, 42.
5 데이비드 W. 홀 외 1명 엮음, 『칼빈의 기독교 강요 신학』, 나용화 외 다수 옮김, P&R, 2009, p. 39에서 재인용.
6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 김종흡 외 3명 옮김, 생명의말씀사, 1988, p. 27에서 재인용.
7 같은 책, p. 27.
8 장수민, 『칼빈의 기독교 강요 분석 1』, 칼빈아카데미, 2006, pp. 24, 25.
9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 김종흡 외 3명 옮김, 생명의말씀사, 1988, pp. 27~29 참조.
10 데이비드 W. 홀 외 1명 엮음, 『칼빈의 기독교 강요 신학』, 나용화 외 다수 옮김, P&R, 2009, p. 39 참고. 칼빈 선생님은 이 사건에 관해 시편 주석 서문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내가 바젤에 피신해 있을 때 몇 사람 외에는 이 사실을 몰랐는데, 바로 그 즈음 많은 신실하고 거룩한 사람들이 프랑스에서 산 채로 화형을 당했다.”
11 데이비드 W. 홀 외 1명 엮음, 『칼빈의 기독교 강요 신학』, 나용화 외 다수 옮김, P&R, 2009, p. 29.
12 상자 하단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1536년 요한 칼빈의 <기독교 강요> 초판을 필름으로 담은 것, 제네바 대학에서 1978년에 제작한 것이며, 한국칼빈주의연구원을 위해 한 부를 복사하여 기증한 것임.’
참고서적
– 데이비드 W. 홀 외 1명 엮음, 『칼빈의 기독교 강요 신학』, 나용화 외 다수 옮김, P&R, 2009.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 김종흡 외 3명 옮김, 생명의말씀사, 1988.
– 장수민, 『칼빈의 기독교 강요 분석 1』, 칼빈아카데미, 2006.
「칼빈 박물관 탐방기 – 칼빈과 기독교 강요」 시리즈
칼빈 박물관 탐방기 (3-1) 칼빈과 기독교 강요 – 제가 이 책을 지은 것은 종교에 열심 있는 사람이 참된 경건의 생활을 하게 하는 것과 귀중한 죽음으로 생을 마친 내 형제들을 변호하려는 것입니다
칼빈 박물관 탐방기 (3-2) 칼빈과 기독교 강요 – 『기독교 강요』,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성경의 가르침 전반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걸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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