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 강해
(12) 한 사람의 범죄와 순종
Geneva Reformed Church 제네바 개혁교회
Reformed Guardian 리폼드 가디언
The Band of Puritans 밴드 오브 퓨리탄스
Geneva Institute 제네바 신학교
오인용 목사
다 함께 로마서 5장 19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 말씀은 원죄 교리의 핵심을 가장 분명하게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는 서로 다른 ‘한 사람’의 행위가 극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전반부의 ‘한 사람’은 하나님께 불순종했고, 후반부의 ‘한 사람’은 순종했습니다. 여기서 불순종한 ‘한 사람’은 아담을, 순종한 ‘한 사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아담의 불순종은 선악과를 먹은 일을 말하며, 예수님의 순종은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일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하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아까 오전 예배 때 창세기 3장을 살펴본 것처럼, 선악과를 따 먹은 사람은 분명히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가 이 세상에 가득하게 된 것이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의 죄 때문이 아닌, 아담 ‘한 사람’의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왜 유독 아담에게 그 책임을 묻는 것일까요? 성경이 하와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대표자가 하와가 아닌, 아담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와가 선악과를 먹어보라고 권했을 때, 아담이 하나님과 맺은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고 그 요청을 뿌리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와는 자기 죗값으로 멸망했겠지만, 온 세상은 아담의 의로움을 따라 영원히 죄가 틈타지 못하는 거룩한 곳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치 썩어 들어가는 팔이나 다리를 잘라내어, 온몸이 죽음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과 유사한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보다도 자기 배필의 요청을 더 중하게 여기다가 그만 하나님께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온 세상을 죄와 사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온 인류와 세상을 ‘대신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대표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세상 사람은 “왜 아담이 죄를 지었는데 내가 그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고 하며 이의를 제기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엄연히 아담 안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런 이의 제기가 잘못이라는 사실은 아담이 순종한 경우를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아담이 순종한 상태에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의로운 일을 행한 것은 아담인데,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우리도 그 결실을 함께 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도 지금처럼 하나님께 그러한 대우가 불의하다며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까? 그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언약의 대표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허락하신 선하신 섭리 안에서 태어나는 존재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그 안에서 태어나는 후손에게 영혼과 육체를 비롯한 그의 모든 것이 전해지게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비롯한 전통적인 개혁주의 견해는 대체로 사람이 잉태될 때 영혼이 새롭게 창조된다는 쪽보다는, 육체와 같이 아담에게서 물려받는다는 쪽을 지지합니다. 즉, 일반적인 생육 방식을 통해서 태어나는 사람은 모든 부분이, 정말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완전히 아담 안에서 생겨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분의 법을 가볍게 여긴 아담의 첫 범죄도 우리의 본성 안에 그대로 자리 잡게 됩니다. 사람들은 바로 그 죄를 따라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교만하게 행하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을 어기는 일을 자발적으로 행하게 됩니다. 범죄자로 세상에 태어나 죄짓기를 즐거워하며, 그런 악한 행위를 계속 더해가기를 바라는 참으로 끔찍한 존재가 바로 아담의 후예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아비 아담의 행위를 따라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자기를 우선하는 일에 아주 능숙합니다. 그 어떤 어려움과 형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어도, 당장 자기를 기쁘게 하는 눈앞의 유익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 세상에 폭행, 강도, 살인, 간음, 전쟁의 소식이 그치지 않는 것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아담 안에서 그의 타락한 본성을 물려받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 문제를 사회구조 개선을 통해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외적인 개선으로 내적인 개선을 이루는 일에는 근본적인 한계와 맹점이 있습니다. 아담은 완전한 환경에서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회구조 개선으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죄에 눈먼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사람이 좋은 교육을 받고 사회가 발전하면 죄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항상 존재합니다. 특히, 자유주의 신학의 광풍이 불었던 19, 20세기 초반에는 그렇게 믿고 생각하는 이들이 교회 안에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좋은 교육과 사회 발전은 도리어 수많은 사람의 삶을 파괴하고 위협하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사람의 교활함과 비겁함과 교만함은 지식이 늘고 사회가 발전하는 정도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한순간에 수많은 인명을 살상(殺傷)할 수 있는 무기의 출현은,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상존하는 세상을 만들어냈습니다.
또한, 우리는 윤리·도덕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아담이 윤리·도덕적 수행(修行)을 게을리해서 죄를 지은 것이 아닌 것처럼, 윤리·도덕에는 죄와 싸워 이겨낼 만한 힘이 전혀 없습니다. 실제로 인류 역사는 윤리·도덕이 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한 사례로 가득합니다.
특히, 중국 역사를 살펴보면 참으로 경악할 만한 사건들이 심심치 않게 나옵니다. 공자·맹자·순자의 유가와 한비자의 법가 등 제자백가(諸子百家) 사상이 태동한 중국이지만, 그 사상이 온전하게 실현된 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잔혹함과 살육, 암투가 대낮에 공공연하게 일어나곤 했습니다. 중국 역사를 읽어보면, 우리나라 역사의 어두운 면은 정말 애들 장난 수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죄 문제와 관련하여 다른 종교에 털끝만큼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종교를 갖고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면, 죄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종교는 사실상 자력구원(自力救援)을 가르칩니다. 이는 그들 가운데 죄가 무엇이며, 그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대표적으로 불교만 봐도 그러합니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세상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이 마음의 탐욕과 생각의 번뇌에서 비롯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마음과 생각을 한없이 비우고 또 비워서, 세상의 모든 괴로움과 고통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난 해탈의 경지에 이르려고 합니다. 여기에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원죄 교리와 같은 가르침이 대체 어디 있습니까? 또한, 아담의 본성에서 비롯하는 탐욕과 악한 생각을 어떻게 비우고 또 비워서 완전히 극복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처럼 불교는 사실 죄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회피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끝없는 회피는 아담이 지은 원죄에서 비롯한 또 하나의 악한 행동입니다. 이와 같이, 그 어떤 종교도 아담이 지은 죄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의뢰하는 종교생활은 죄악과 어리석음을 더할 뿐입니다. 역사는 이방 종교가 죄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하반절이 그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죄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불완전한 자기 노력과 행위 대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행하신 그분의 의로운 행위를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담 안에서 태어나 그의 모든 죄과(罪過)를 물려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참으로 알고 믿는 것처럼,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이들은 그분께서 행하신 모든 의로운 행위를 값없이 물려받게 된다는 사실도 진정으로 알고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오늘 본문 말씀을 근거로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만인구원론(萬人救援論)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아담의 범죄로 온 세상이 죄와 사망의 구렁텅이에 빠졌으니, 둘째 아담의 순종은 모든 사람을 생명으로 이끌어내야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는다는 사실, 즉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일부를 택하시고 나머지는 유기하셨다는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 앞에서 무너지고 맙니다.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 사이에는 공통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차이점도 있습니다.
우리는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이 죄를 짓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상속받는 나라는 아담이 머물던 에덴동산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습니다. 아담은 분명히 모든 인류의 머리요 대표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류가 아닌, 오직 성부께 택하심을 받은 이들, 곧 교회의 머리이자 대표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만인구원론은 물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모든 사람을 구원할 구세주로 세우셨으나 그 뜻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사람의 손에 맡기셨다는 아르미니우스주의 역시 명백하게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성부께 택함 받은 이들만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한 성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은 모두 구원에 이르고, 받지 못한 사람은 모두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이 없는 이들에게 아무리 복음을 완전무결하게 전해주며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으라고 해도, 그들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는 그렇게 할 의향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러한 이들을 가리켜 유기된 자, 곧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대표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의 실존은 참으로 비참합니다. 하나님의 원수이며 죄를 저지른 범죄자이고, 죄와 허물로 죽어서 자기 힘으로는 조금도 상황을 개선할 수 없는 무능력자입니다. 죄는 그의 주인이자 왕이며, 그는 죄의 충직한 노예이자 신하입니다. 그들의 지식과 경험과 고매한 행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격하하는 죄를 합리화하는 데 쓰입니다.
하룻강아지가 호랑이 앞에서 겁 없이 날뛰듯, 자기보다 더 지혜롭고 힘 있는 이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게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분의 말씀과 계명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무시하면서도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확신합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영원한 지옥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그런 엄청난 상황에 놓여있는 줄도 모르고, 태연자약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려줘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맹렬하게 타오르는 지옥 불이 그들을 삼키기 전에 빨리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믿고 의뢰하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는 불신자가 듣기 좋은 재미있는 말을 건네면서 그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참으로 진지하고 엄중하며 긴급하게 그들이 처한 실제 상황이 어떠한지 깨우쳐주려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농담이나 그를 칭찬하는 말을 건네며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에드워즈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설교했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한 영혼을 깊이 사랑하고 염려하는 그의 마음이 어떻게 설교에 나타났는지를 곰곰이 헤아려봐야 합니다. 에드워즈는 죄인이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진지하고 엄중하며 긴급한 말로써, 죄인이 처한 실제 상황이 어떠한지를 깨우쳐주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손에 매달려 있는 곳은 진노하는 큰 용광로요, 넓고 바닥이 없는 구덩이이며, 진노의 불로 충만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지옥에 있는 저주받은 많은 사람에게 타오르듯이 여러분에 대해서도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중보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며, 여러분 자신을 구하기 위해 붙잡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진노의 불길을 피할 곳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한순간만이라도 여러분을 붙잡도록 할 만한 것을 한 적도 없었고, 할 수도 없습니다.」1
그렇습니다. 원죄는 그만큼 무섭고 끔찍합니다. 원죄가 무엇인지 알고 나서 그리스도께 달려가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 사람이 그토록 뻔뻔하고 방자한 것은, 그만큼 자신이 저지른 죄의 끔찍함과 그에 따른 형벌이 어떠한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악독함과 그것에 약속되어 있는 하나님의 진노를 온 힘을 다해 외면하고 잊으려 합니다. 얼굴에 두꺼운 철판을 깔아놓고, 지금만 잘 넘기면 된다는 말로 자신과 남을 속이는 일에 탁월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으실 것이며, 혹 물으셔도 지금껏 행한 선한 행실이 자신을 충분히 변호해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과 행동이야말로 죄악의 극치이며, 예수님과 싸워 이겨보려는 것인 줄도 모른 채로 말입니다.
여러분, 이 모든 일이 어디에서 비롯했습니까? ‘한 사람’, 곧 아담의 불순종에서 말미암았습니다. 그 죄가 우리 눈과 귀를 막아 온갖 악을 즐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담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즐긴 그 많은 죄악은 아담의 죄가 다름 아닌 우리의 죄라는 사실을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아담과 함께 죄를 저지르고 즐거워한 공범(共犯)이요, 동업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아담을 탓한다는 말입니까? 그런 생각은 명백한 책임 회피이며, 자기 위에 머물러 있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애써 잊으려는 악한 죄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원죄 교리를 있는 그대로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물론, 원죄 교리는 세상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가르침입니다. 원죄 교리를 정말 제대로, 그리고 자주 선포하는 교회일수록 세상의 미움과 핍박을 많이 받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의 숫자도 확연하게 줄어듭니다.
그래서 현대 교회 대부분은 이 원죄 교리를 잘 가르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아담 안에서 태어난 죄인이라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정으로 깨닫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정말 진실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에 자신을 의탁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인 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도 오만방자하게 행동할 뿐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자주 묵상하십시오. ‘한 사람’의 범죄가 어떻게 우리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죄로 가득하게 했으며, 또 다른 ‘한 사람’의 순종하심이 어떻게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셨는지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여러분의 전인격을 새롭게 하는 은혜가 여러분과 항상 함께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각주
1 조나단 에드워즈,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 (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 백금산 옮김, 부흥과개혁사, 2010, pp. 42,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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