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박물관 탐방기
(1) 칼빈과 칼빈 박물관
김수용
여러분께서는 혹시 종교개혁에 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개혁(改革)’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법이나 제도 따위를 새롭게 고쳐 올바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 앞에 ‘종교’라는 낱말을 붙여서 ‘종교개혁’이라고 하면, 그때는 어떤 종교를 새롭게 고쳤다는 일반적인 뜻을 넘어서게 됩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16~17세기 유럽에서는 로마 카톨릭의 오류와 부패에 대항하여, 하나님 말씀의 권위와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해 광범위한 개혁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던 수많은 사람이 일어나 진리를 위해 기꺼이 자기 생명을 내걸었습니다. 이 개혁 운동을 가리켜 사용하는 말이 바로 ‘종교개혁’입니다.
제가 읽었던 어떤 책에서는 종교개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놓았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상부 구조는 손상을 입었는데,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존 위클리프, 얀 후스, 제롬 사보나롤라)이 그 일부분을 허물어뜨리기 시작했고, 마틴 루터가 상부 구조의 잔해를 청산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 위에 뿌리박은 튼튼한 새로운 구조물을 세웠으며, 그 건물의 완성은 훌륭한 건축가인 존 칼빈에게 맡겨졌다.」1
이 탐방기를 통해 소개하고 싶은 인물이 바로 위 글에서 훌륭한 건축가로 묘사된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하 칼빈 선생님)’입니다. 칼빈 선생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507년 전인 1509년 프랑스 누아용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신학자이자 목회자로 살아가신 칼빈 선생님께서는 주로 제네바와 스트라스부르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분이 실제로 활동한 도시는 많지 않았지만, 그분이 끼친 영향은 유럽 역사 전반(全般)에 이를 정도로 모든 부분에서 깊고 광범위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칼빈 선생님께서 태어나고 활동하셨던 곳을 방문한 뒤 탐방기를 쓰게 된 것일까요? 아쉽게도 그렇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곳에 가볼 수 있기를 바라고 있지만, 아직 유럽은커녕 아시아 대륙도 벗어나 본 일이 없습니다.
대신, 저는 우리나라에 있는 ‘칼빈 박물관’을 다녀왔습니다. 칼빈 박물관은 칼빈 선생님께서 실제로 활동하신 곳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곳에 전시되어 있는 자료는 어디 내놔도 흠잡을 데 없는 좋은 자료들입니다. 저는 이 탐방기를 통해 칼빈 박물관에 전시된 자료와 함께, 칼빈 선생님을 몇 가지 주제에 맞추어 소개하려고 합니다.
탐방기를 작성하면서
– 나 같은 사람이 탐방기를 작성해도 될까?
우선, 저에 대한 소개를 간략하게 해야 할 듯합니다. 저는 부모님의 종교를 이어받아 약 이십여 년간 천주교인으로 살아오다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복음을 알고 믿고 고백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또한, 저는 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하루 평균 8시간씩, 주 5일 근무를 하면서 살아가는 평범한 직장인 청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이 탐방기를 써달라는 제의를 받았을 때, 무겁고 복잡한 마음과 생각이 드는 일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스스로 잘 알고 있는데, 나 같은 사람이 과연 이런 글을 작성해도 될까? 아니, 글의 성격은 둘째 치고, 함량 미달의 글을 썼다가 칼빈 선생님과 박물관 측에 괜한 누를 끼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고심 끝에 이 글을 작성하기로 조심스럽게 마음먹었습니다. 무엇보다 저와 비슷한 상황에 계신 그리스도인분들, 다시 말해 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일반 성도 분들에게 같은 성도로서 칼빈 선생님과 그분이 물려주신 좋은 신앙 유산에 관해 조금이나마 소개해드리고 싶었습니다. 물론, 저는 칼빈 선생님을 높이고 찬양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칼빈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 어떻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는지를 말하려고 합니다.
두 번째, 칼빈 선생님과 그분이 물려주신 좋은 신앙 유산을 알아가면서 누렸던 유익한 점을 다른 분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비록, 인터넷의 특성상 제 글을 읽으실 분들이 어떤 신앙을 가지고 계신지, 또 어떤 상황에 계신지 알 수 없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세 번째,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그리스도인은 교회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교회에 섭리해 오셨는지 알아야 해!’ 하는 생각으로 교회사 책 한 권을 집어 들지만, 몇 장 못 넘기고 이내 잠들어 버리는 저에게도 교회사를 공부할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칼빈 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 2012년 8월, 칼빈 박물관을 찾아가다
칼빈 박물관은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에 속한 부설기관입니다. 제가 이 박물관을 처음 방문했던 때는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2012년도로, 출석하는 교회에서 교우들과 함께 단체로 그곳을 방문하였습니다.
박물관을 처음으로 찾아갔던 그날은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8월의 어느 무더운 날이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박물관이 아닌 요한 성당이라는 거대한 성당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커다란 성당 옆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자, 우리가 찾던 바로 그 박물관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길을 안내해주시던 분께서 “도착했습니다.”라고 말씀해주시기 전까지는, 그곳이 박물관인지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박물관’ 하면, 입구에 ‘무슨 무슨 박물관’과 같은 간판이 큼지막하게 걸려 있고, 넓은 주차시설을 갖춘 번듯한 건물을 연상합니다. 하지만 칼빈 박물관은 일반적인 생각을 많이 벗어나는 겉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 4년 전 첫 방문 때 돌아가는 우리 일행을 배웅해주시는 정성구 박사님의 모습
3층 빌라와 비슷한 모양새를 한 이 건물 입구에는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글씨를 보고 나서야 이곳이 빌라가 아닌 연구원이자 박물관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이 연구원 원장이신 정성구 박사님께서는 당시 수술하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는데도 저희를 아주 반갑게 맞이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음료 한 잔을 함께 나누면서, 이 연구원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다 함께 연구원 지하에 있는 박물관으로 내려가서, 전시 중인 자료에 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박사님께서 자료들을 자세히 설명해주신 덕분에, 그냥 지나쳤을 법한 자료들도 모두가 관심을 기울여서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 제네바 시(市)와 존 칼빈이 시무한 성 피에르 교회의 모습(청록색 철탑 건물)
– 칼빈 박물관으로 내려가는 통로에 걸려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박사님의 설명을 잘 귀담아듣기는커녕, 전시된 자료에 눈길을 주는 것조차도 버거워하다가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당시 저는 천주교에서 개신교로 개종하고서 세례를 받은 지 아직 일 년도 채 안 된 상태였던 터라 참된 기독교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지금도 아는 것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그때는 더 했습니다. 그래서 이곳이 칼빈 선생님이라는 분과 관련된 여러 자료를 전시해놓은 박물관이라는 것 정도밖에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8월의 무더위에 지친 나머지, 몸에는 힘이 없고 머리도 조금 어지러운 상태였습니다. 아마도 더위를 먹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요.’라는 식으로 박물관 견학을 마쳤습니다. 그날의 기억은 ‘그때, 왜 더 인내하면서 설명에 귀 기울이지 못했을까? 전시된 자료를 다시 한 번 살펴볼 수 있다면 참 좋겠다.’하는 무안함과 아쉬움을 불러일으키곤 했습니다. 그러던 지난 2015년 8월,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두었던 생각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여름 휴가를 맞아, 다시 한 번 박물관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다시 찾은 칼빈 박물관
– 대한민국에 있는 칼빈 박물관을 소개합니다(1)
3년 만에 다시 찾은 박물관은 그동안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듯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3년 전에는 정성구 박사님께서 맞아주셨고, 지금은 관계자분께서 맞아주셨다는 점뿐이었습니다. 박사님의 안부를 묻는 질문에 관계자분께서는, 박사님께서 건강이 그리 좋지 않으신 상태라고 답해주셨습니다.
부설기관인 칼빈 박물관을 얘기하기에 앞서, 주기관인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을 먼저 소개하는 편이 순서일 듯합니다.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은 지금으로부터 31년 전인 1985년에 설립되었습니다. 원래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서초동에서 문을 열었지만, 1996년에 지금의 위치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연구원의 설립 취지와 목표는 연구원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정성구 박사님의 인사말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은 종교 개혁자 존 칼빈과 그 후학(後學)들 그리고 칼빈주의 사상을 학문적으로 또는 실제적으로 깊이 연구해서, 개혁주의 교회 건설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2
연구원(박물관까지 포함)에서 소장하고 있는 칼빈과 칼빈주의 자료는 무려 일만 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 정도 자료량이면 어떤 단체나 기관의 후원과 도움으로 설립되었을 법 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곳은 연구원 원장이신 정성구 박사님, 단 한 분의 헌신으로 설립된 곳입니다.
박사님께서는 총신대학교에서 설교학과 칼빈주의를 가르치는 교수이자 학장으로 일하셨고, 총신대학교회를 개척하여 목사로 섬기셨으며, 많은 눈물과 땀으로 칼빈주의를 연구하는 연구원을 설립하셨습니다. 박사님께서는 이 연구원이 한국 교회의 신학과 신앙의 뿌리 역할을 하여, 후대의 한국 교회가 철저히 칼빈주의적이고 성경적인 기초 위에서 부흥하고 성장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연구원을 시작하셨다고 합니다.3
박사님께서 연구원 설립과 운영을 위해 자료를 수집하시는 과정에서 겪으신 일화가 눈길을 끕니다. 지금이야 우리나라 사람이 여행, 유학, 출장 등의 목적으로 유럽에 머무는 일이 많지만, 박사님께서 유학생활을 하신 1970년대 초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 세대 사람들이 그 시절 타지에서 겪어야 했던 힘없고 가난한 국민의 애환과 고달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박사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적인 비애에 치우치기보다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자료를 많이 모아서 한국 교회를 위해 봉사하겠다고 다짐하셨습니다. 그리고 훗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자, 유럽 일대를 돌면서 자료를 모으기 시작하셨습니다. 박사님께서는 자료의 전쟁(戰爭)이 곧 학문의 전쟁이고, 자료가 있는 곳에 학문이 핀다고 말씀하셨던 것처럼,4 좋은 자료에 대한 확신을 갖고 투자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가끔 연구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 연구원을 이루기까지, 나는 칼빈주의 연구를 위해 맛이 간 사람이었다고 말해 왔다. 즉 일생 동안 칼빈주의 연구원을 만들기 위해서 미쳐 지내왔다는 말이다. (중략)
나의 칼빈주의에 대한 관심은 1970년대 초 화란에서 유학을 하면서 본격화되었다. 내가 그토록 원하고 바라던 유학생활은 너무 너무 힘들고 고달팠다. (중략) 그러던 중 내 마음을 스치고 지나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지금 개혁신학과 신앙의 본고장인 화란에 와 있는데, 앞으로 한국에 돌아가면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자료를 충분히 모아서 한국교회를 위해서 봉사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중략) 하지만 유학 시절 동안 자료를 모으는 일은 그림의 떡일 뿐, 내가 구입하고 싶은 것은 모두 살 수가 없었다.
후일 귀국해서 총신대학교 교수가 되고 1980년에 총신대학의 학장이 되자 해외여행이 잦았고 약간의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본격적으로 칼빈과 칼빈주의 자료 수집에 전력투구하게 되었다. (중략) 자료 때문에 아내를 속인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고, 어떤 때는 십만 원짜리를 만원에, 만 원짜리를 천원에 샀다고 둘러대기도 했다. (중략)
유럽을 여행할 때는 기가 막힌 일들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주로 화란, 스코틀랜드, 영국, 스위스, 독일 등지의 여행에는 참으로 자료수집 재미에 푹 빠졌다. 어떤 때는 자료구입비로 돈을 다 쓰고 생수 한 병과 빵 하나로 하루를 버틴 적도 있다.」5
이렇게 모으신 자료와 이런저런 상황이 맞물려서, 결국 1985년 서울특별시 강남구 서초동에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이 설립되기에 이릅니다. 물론, 당시 연구원 건물 역시도 사비로 얻은 것입니다. 이때의 일화 역시도 눈길을 끕니다. 박사님께서는 연구원 건물을 얻기 위해 본인 소유로 있던 야산 21만 평을 헐값에 넘겨 버리셨습니다.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에 있던 야산 21만평을 매각했다. 불과 2천만 원 정도의 헐값으로 매각했다. 이 야산은 옥천의 누이가 소개해서 앞으로 큰일을 하려면 야산이 필요하다고 해서 여러 해 전에 구입해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 설립을 위해서 생각 없이 결단을 내리고 팔았다. 그리고 그 돈으로 서초동 서울 고등학교 앞에 있는 2층 30여 평의 건물에 전세를 얻었다. (중략)
연구원을 세우려고 팔아버린 영동의 야산 21만평은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는 순간 값이 여러 배로 뛰었고 오늘날은 기가 막힌 위치에 비싼 땅이 되었다.」6
박사님께서는 이 연구원을 일구시면서 자신을 ‘칼빈 연구를 위해서 맛이 간 자’였다고 표현하셨는데, 위의 짧은 일화들만으로도 그 열정과 강단이 어떠했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을 듯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모인 참으로 귀중한 자료들을 바로 이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무료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청년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큰 축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현지에 직접 찾아가도 쉽게 볼 수 없었던 자료가, 이제는 인터넷 검색 창에 몇 글자를 입력하면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서점에는 누군가 번역해 놓은 좋은 신앙 서적이 수도 없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최소한 요즘에는 좋은 자료의 결핍으로 인해서 신앙 생활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축복은 비단 자료의 양과 질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 당시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많은 핍박과 피 흘림과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피 흘려 지켜내고자 했던 올바른 교리를 누구의 간섭이나 방해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배우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헌법에 따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신앙의 선배가 잘 닦아놓은 길을 잘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 정성구 박사님께서 직접 찍어 오신 사진.
– 17세기 스코틀랜드 언약도의 신앙고백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칼빈 박물관 소장).7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런 좋은 것들을 쉽게 누리는 만큼, 그런 것들의 소중함도 쉽게 잊어버립니다. 때론 그런 것들이 너무나도 당연해서 무덤덤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세대가 누리는 축복은 그런 면에서 불행처럼 작용합니다.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기에, 정작 진지하게 고민하고 추구해야 할 중요한 것들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그러한 가벼움 속에서 자유주의, 인본주의 등이 힘을 얻어서, 이제는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경계선 자체가 희미해졌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외치는 소리는 많지만, 예전처럼 진리를 분명하게 외치는 소리는 아주 희미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사를 더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교회사를 배우면서 ‘그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죽기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왜 그래야만 했을까?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까지 하게 했던 것일까?’ 생각해보면서, 우리 신앙의 진지함과 열심을 새롭게 해야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 아르미니우스주의자에 대항하여 예정론을 비롯한 칼빈주의 체계를 수립한 도르트 회의 모습(칼빈 박물관 소장)
이 글은 탐방기이기에 칼빈 선생님의 생애 전체를 구체적으로 다루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또한 글쓴이의 부족함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줄 것입니다. 여러 모로 부족하겠지만, 부디 이 글을 통해서 성도분들께서 칼빈 선생님과 박물관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시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 글에서는 부설기관인 칼빈 박물관과 그곳에 전시된 몇몇 자료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또한, 칼빈 선생님의 경건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조금이나마 소개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개혁주의와 칼빈 선생님을 알게 해주시며, 이곳 박물관을 방문할 수 있도록 섭리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글과 앞으로 써나갈 글 속에서 오직 주님께서만 영광 받으시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각주
1 시드니 휴튼, 『기독교 교회사』, 정중은 옮김, 나침판, 1988, p. 192
2 정성구,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 인사말
3 정성구,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 연혁
4 같은 글.
5 같은 글.
6 같은 글.
7 이들 일부는 이 신앙고백에 피로 서명하기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이들이 그렇게 생명을 걸고 지켜고자 했던 진리는, 교회의 머리가 영국 국왕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진리를 지키는 일에 힘을 다해 싸웠던 언약도는 결국 1만 8천여 명에 이르는 사람이 순교하는 일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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