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 강해 (6) – 하나님의 예정
Geneva Reformed Church 제네바 개혁교회
Reformed Guardian 리폼드 가디언
The Band of Puritans 밴드 오브 퓨리탄스
Geneva Institute 제네바 신학교
오인용 목사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엡 1:4~11, 개역한글판)
지난번에도 예정의 교리에 관해 한 번 강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정의 교리는 한두 번 강의를 듣는다고 해서, 충분히 이해하고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예정의 교리는 할 수 있는 한 많이 강의하고, 반복해 들어야 합니다. 지금부터 소요리문답 제7문 “하나님의 예정은 무엇입니까?”에 관해 설명하면서, 지난번에 미처 다루지 못했던 내용도 함께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정의 교리는 교회 안에서 논란과 논쟁을 가장 많이 일으키는 교리입니다. 하지만 저는 예정을 인정하지 않고 의심하여서 교회를 소란하게 하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방금 읽은 말씀만 해도 ‘예정’이라는 단어가 벌써 몇 번이나 나옵니까? 5절에 한 번, 9절에도 한 번, 그리고 11절에도 한 번 나옵니다. 여기서 사용된 이 ‘예정’이란 단어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사용하고 있는 본래 단어입니다. 예정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원문에도 없는 단어를 억지로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예정이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미리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이 ‘예정’에 관해 말해주면, 사람들은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기 시작합니다. 특히 칼빈과 칼빈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무척이나 심한 거부 반응을 보입니다. 이처럼, 칼빈주의 교리 중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심한 반발을 받고 가장 받아들여지지 않는 교리가 바로 예정의 교리입니다.
하지만 전에도 얘기했듯이 예정의 교리는 성경이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는 교리입니다. 루터도 예정을 받아들입니다. 왜 그리했겠습니까?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교리는 어거스틴이나 칼빈이 만든 교리가 아닙니다. 성경에 없는 내용을 억지로 짜 맞추어 탄생한 잘못된 가르침이 전혀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이 사실을 알고 전제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예정의 교리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도 심심하신 나머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나 한번 창조해볼까? 사람이나 한번 창조해볼까? 동물이나 한번 창조해볼까?”라고 하시면서, 심심풀이로 세상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이 세상에서 일어날 모든 일을 ‘미리’ 정하시고 세상을 지으셨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원 전에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그 안에 우리의 구속, 인간의 타락, 마귀의 반역도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 계획 안에는 정말 모든 일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에서 하나님의 예정을 배제하고 싶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시지 않으셨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자유의지로 예수님 믿기를 선택할 것을 미리 아시고(예지, 豫知) 그 사람을 택하셨을 뿐이다.”
그러나 그 말은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그렇게 하셨다면 구원의 근거와 공로는 결국 누구에게로 돌아가게 됩니까? 사람의 ‘선택’에 있게 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우리를 ‘택하셔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미리’ 선택해주지 않으셨다면, 아무리 설득력 있는 좋은 말로 주님께 나오라고 해도 나오지 않습니다. 구원의 영역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예정 하심이 예외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기로 이미 창세 전에 예정하셨기에, 즉 영원한 세계와 시간 속에서 나를 이미 택해주셨기에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 같이 잠언 16장 33절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결정은 여호와께서 하신다.” (바른 성경)
킹 제임스(흠정역)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비는 겹친 옷자락 속에서 사람이 뽑으나 그것의 모든 배분은 주께서 하시느니라.”
그렇습니다. 모든 결정은 결국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겉으로 볼 때는 사람이 결정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일은 다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신 대로 일어납니다. 전쟁, 태풍, 폭동, 또 한 나라와 민족의 흥망성쇠도 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대로 일어나고 진행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 하심과 별개로 일어나는 일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칼빈주의자(개혁주의자)들이 “만사는 다 하나님께서 하시니까, 우리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아도 다 알아서 돌아간다.”라는 운명론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믿는 이들은 힌두교도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내가 가난하게 사는 것도 신의 섭리니까 부자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고 열심히 일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다 어쩔 수 없는 신의 섭리이므로 순응하고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이에 비해,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여 구원하시기로 정하셨으니, 그 계획과 섭리를 따라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재능과 지식과 열심을 마음껏 발휘해야겠다. 그래서 그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겠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는 가장 열심히 일할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해줍니다. 여러분, 역사적으로 북유럽은 칼빈주의이고 남유럽은 카톨릭입니다. 그런데 이 둘 중에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강조하는 북유럽에서 경제가 훨씬 더 발전했습니다. 현대 자본과 경제 개념이 형성되고 발전한 곳은 칼빈주의를 따르던 지역입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는지 아십니까? 칼빈주의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예비해두신 것들을 우리가 건전하게 누리고 사용할 수 있다는 확신 속에서 각자에게 주신 소명과 재능에 충실할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정의 교리를 굳게 믿어야 신앙생활을 온전하고 흔들림 없이 잘해나갈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든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따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예정 하심을 모든 면에서 확고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제일 먼저, 구원의 영역에서 그리해야 합니다. 구원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이 작용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지 않았는데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 지금 이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선택을 따라서, 즉 구원받기로 창세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기에 건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죽음에 이르렀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택하시지 않은 불택자(不擇者)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그 사람을 택하지 않으셨기에, 그 사람은 구원의 소식을 거절하거나 듣지 못한 채로 생을 마감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선택과 유기를 모두 하나님께서 홀로 창세 전에 정하셨다는 교리가 바로 이중 예정(선택과 유기)의 교리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이중 예정의 교리를 반드시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온전히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또, 국가의 운명과 흥망성쇠 및 개인의 모든 삶을 비롯한 역사의 전 과정은 다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속해 있습니다. 우리 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세우신 그 계획은 어떻습니까? 완전합니다. 명확하고 분명합니다. 더는 손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처럼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일 앞에서 “아차, 이거 계획을 잘못 세웠구나. 그러면 이렇게 해야겠다, 아니지 아니야 저렇게 해야지.”라고 하면서 막 허둥지둥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는 그런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악의 세력이 아무리 커진다고 해도, 조금도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와 같이 악의 세력이 커질 것도 다 하나님께서 이미 예정해두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 이 세상에는 많은 혼란과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앞으로 이 세상에 닥쳐올 정말 큰 환란이 나와 있습니다. 그 환란의 크기와 세기는 분명히 사람의 예상치를 훨씬 웃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환란조차도 계시록에는 이미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된 대로 장차 이 세상에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입니다. 또한, 현재 수많은 이교(異敎)가 무서운 기세로 번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 역시도 다 하나님의 예정 하심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부터 종말의 날까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일을 보시면서 ‘야, 이거 야단났네. 대체 이걸 어쩐다.’라고 하시며 근심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이 들 수는 있습니다.
“야, 저렇게 악한 배도의 세력이 날로 커져만 가는데, 하나님의 참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주님의 교회를 지켜나갈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 염려 가운데서도 우리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리의 주(主)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악은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계시록을 살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적그리스도와 사탄의 세력을 지옥에 영영히 가두시지 않습니까? 그들을 무저갱에 던져 넣으시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우리는 이미 최종 결과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나라 대표선수들이 다른 나라 선수들과 축구 경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그날 그 경기를 생중계로 봤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이겼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 다른 일 때문에 중계를 못 본 이들은 다음날 녹화된 경기 화면을 보면서 우리나라를 응원합니다. 그들은 경기상황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합니다. 그때, 정말 우리나라가 질 것 같은 상황이 전개됩니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이러다 지면 어쩌나 하면서 근심하고 초조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기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슬아슬한 장면 앞에서도 그리 놀라지 않습니다.
예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 하심 가운데 악이 무너지고, 불신자가 망하며,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국가와 민족과 개인이 멸망하는 모습을 미리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거대한 세상 세력의 보호 아래, 악은 날로 번성하고 교회는 너무도 무기력해 보입니다. 교회를 미워하고 대적하는 악의 세력은 점점 크고 강해지는데 참된 그리스도의 백성은 점점 줄어드는 것 같고, 진리는 천시받고 기초가 점점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영원한 승리를 향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 신학생은 더 용기를 내십시오. 비록 배도와 배교의 세력이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막강하다고 해도, 저들은 결국 멸망하고 무너질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예정 하심 속에서 진리가 이미 이겼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악은 이미 무너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악의 융성은 최후의 발악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다음 주일은 부활 주일입니다. 부활의 근본 의미가 무엇입니까? 교회에서는 부활 주일이 다가오면 보통 계란을 삶아댑니다. 저도 그런 부활 주일 행사가 열리는 것을 자주 봤고, 또 교회 사역하면서 그런 일을 하기도 했지만 그런 행사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가 부활의 참된 의미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려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죄와 사망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생명, 즉 영원한 생명에 관해 말해주어야 합니다. 이 생명이 바로 성도가 영원히 누릴 참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설령 이 세상에 악이 가득하고 번성해서, 당장 내일이라도 교회가 완전히 다 무너지고 진리가 내팽개쳐질 것만 같은 상황이 와도 근심하거나 용기를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믿음의 눈을 들어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사망은 생명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 어떤 악의 세력도 그리스도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미 승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우리는 이미 승리한 것이지,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승리했습니다. 악의 세력은 이미 패망하였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가만히 읽어 보십시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구속 역사에 나타난 중심 주제가 무엇입니까? 바로 악의 세력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대적하고, 주님께서는 결국 그들을 무찌르고 승리하시는 것입니다. 한 번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죽 읽어 보십시오. 그리고 그 내용을 머릿속으로 가만히 생각하고 정리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계획을 베풀어주시고, 사탄은 그 구원의 계획을 어떻게 하든지 망가뜨리려고 합니다. 심지어 무슨 짓까지 합니까? 어떻게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속하지 못하게 하려고 베들레헴에 군대를 보내서, 두 살 아래의 아이는 다 죽여버리는 일도 아무렇지 않게 저지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유다 백성을 타락하게 하고 우상을 숭배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이 여러모로 어려움과 훼방과 모독을 받게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계획대로 모든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육신으로 세상에 오시고, 세례 요한의 사역이 마쳐질 때 즈음 3년의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골고다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시고 돌아가십니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십니다. 이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었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구원의 계획을 창세 전에 단 한 번 세우셨습니다. 마귀가 그 계획을 아무리 훼방하고 어떻게든 무너뜨리려고 기를 써도 번번이 실패할 뿐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마지막 일이 뭡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재림을 가장 싫어하는 자들이 누구이겠습니까? 적그리스도의 세력, 즉 마귀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자기들이 완전히 끝장나고 멸망할 줄을 가장 잘 압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장 극렬하게 훼방하고 부정하고 방해합니다. 그러니 오늘날 배도와 배교의 세력이 제일 싫어하고 부정하고 싶은 사실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지막 때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더욱더 영적으로 깨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완성과 승리를 맛봐야 합니다. 그러면서 악의 세력을 경계해야 합니다. 예수님 오실 때가 가까울수록 악의 세력은 점점 더 번성합니다. 그래서 그 거짓 세력에 의해서 진리는 완전히 가려지는 것 같고, 진리를 좇는 이들은 지극히 소수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재림하시는 일을 감히 어느 누가 막겠습니까? 그 어떤 악의 세력도, 그 어떤 권세나 강력한 정치적인 세력도 예수님의 재림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참되게 믿는 자는 그와 같은 확신 가운데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 확신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예정입니다.
개인적인 측면에서도 예정의 교리는 사람을 가장 편안하게 하고 안심하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부터 죽는 일까지 다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아까 여기 있는 형제 한 분이 우리에게 “하마터면 낙태될 뻔 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 형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무사히 태어나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우리가 태어나는 것을 비롯하여 살고 죽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뜻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가 결혼하는 것도,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어떤 삶을 사는가도 다 하나님의 예정 하심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주님의 선하신 뜻이 우리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믿고 소망하면서, 진리가 가르치는 대로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조금이라도 그 길에서 벗어나는 일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이, 어리석게도 자기가 인생의 절대적인 주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노력해서 성공하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 끝은 멸망입니다. 여러분, 가장 온전한 삶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예정하셨다는 것, 그래서 이 거룩하고도 영광스러운 은혜의 계획 안에 내가 속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귀합니까?
예정의 교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예정의 교리를 부인하거나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일은 하나님을 피조물 수준으로 격하하는 것입니다. 예정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예정하시기에는 그 능력과 지혜가 조금 부족하시다는 것과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아니시며, 그 능력과 지혜가 무한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든 일을 정해두셨지만, 우리 인간의 생각과 판단으로는 그 계획을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예정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실타래를 풀어가듯 이 세상일을 풀어가실까?” 우리는 다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 그러한 사실이 밝히 드러납니다.
사도행전 2장 23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일은 우연도 아니고, 마귀의 승리도 아닙니다. 보십시오. 성경은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이라고 증거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로 예정하시지 않으셨으면, 예수님께서는 결코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저 법 없는 자들의 손”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것입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저 불법자에게 내어주셔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습니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나타내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예수님께서 법 없는 자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이러한 엄청난 일조차도 하나님의 예정 하심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계획된 일이라면, 하물며 그보다 훨씬 못한 다른 일들이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예정이 무엇이며, 그 영광이 어떠한가를 가장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사건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강론한 예정의 교리는 교회가 실질적으로 잊어버린 교리입니다. 사실 다른 모든 교리도 다 잊어버린 상태지만, 적어도 장로교회나 개혁교회에서 예정의 교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지금의 상황은 너무도 ‘치명적’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성경의 교리를 알지 못한 채로 신앙생활을 하니, 어떻게 온전하고 건전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 즉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정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라는 사람을 친히 아시고 선택하여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장차 영원한 주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예정하신 대로 우리를 계속 선하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진리가 얼마나 우리에게 평안을 가져다줍니까? 구원받지 못할까 봐 벌벌 떨거나, ‘오늘 내가 죽으면 지옥에 갈까, 천국에 갈까?’ 하면서 불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반면, 로마 천주교도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자신의 구원 여부를 확신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예정 하심을 믿고 의지하지 않고, 자기 행위와 선택을 믿고 의지하니 그렇습니다. 그게 얼마나 미련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창세 전에 이미 선택하셨고 그래서 오늘 내가 구원받았다.” 이보다 우리의 신앙을 더 강력하고도 견고하게 해 주는 교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교회가 이 예정의 교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니까, 많은 그리스도인이 막연함 속에서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좀처럼 자기 구원을 확신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절대로 그러지 않으셔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괜히 쓸데없이 이런 복잡한 교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분이 이 자리에 있지는 않으시겠지요? 예정의 교리는 사람이 만들어낸 교리가 아니라, 성경이 스스로 증거하는 교리입니다. 또한 매우 중요한 교리이기에, 이렇게 방대하게 지면을 할애하여 교리문답집에 자세하게 설명해놓은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예정의 교리가 구속사적으로, 또 역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굉장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마음에 깊이 새겨놓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집에 가셔서 여러 성경 구절도 같이 찾아보시면서,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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