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전 (PRE)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2-2) – 전 (PRE)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발자취를 따라서(프라하)
설형철
지난 탐방기에 이어서 얀 후스가 남겨놓은 흔적들을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약 1,100년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프라하에는 중세의 고딕 양식에서부터 현대의 모더니즘 양식에 이르기까지 독특하고 아름다운 건물들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프라하는 유럽 여행을 가는 한국인들이 꼭 들러야 하는 장소로 꼽힐 만큼 인기가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후스에 관한 자료를 검색하면, 프라하 광장에 서 있는 그의 동상 사진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많은 사람들이 후스를 알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냥 프라하에 온 기념으로 눈에 잘 띄는 그의 동상을 찍어서 올려놓았던 것일 뿐이었습니다. 부디, 이 글을 보는 독자들이 얀 후스와 종교개혁자들, 그리고 종교개혁에 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체코에서의 둘째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아침 햇살에 눈을 떠보니, 아주 맛있고 특별한 아침 식사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머무르던 민박집에는 당시에 투숙객이 2명밖에 없어서, 민박집 이모님이 특식으로 오므라이스를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이모님은 근처에 있는 한인 교회를 섬기는 교인이라고 하시면서, 이 주변에는 이단도 많고 교회 간의 다툼도 적지 않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프라하에 한인 교회가 그렇게 많지는 않을 텐데, 서로 연합하지는 못하고 싸운다는 소식에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모님이 해준 맛있는 아침을 먹고 난 뒤에, 저는 어제 세워둔 일정을 다시 한 번 점검하면서 민박집을 나왔습니다. 오늘 탐방의 최종 목적지는, 후스가 진리를 선포했던 장소인 베들레헴 채플(예배당)이었습니다. 그곳으로 가기에 앞서, 잠시 발길을 구시가지(舊市街地) 쪽으로 돌려 광장에 들렀습니다. 서두에도 언급했던 그 커다란 얀 후스의 동상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잠시 동안 부지런히 발품을 팔자, 이내 커다란 얀 후스 동상이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전날 보았던(지난 탐방기 참조) 후시네츠에 있는 동상과 비교해보니, 프라하 쪽이 좀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근엄한 모습이었습니다.
▲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에 있는 얀 후스의 동상 – 크기가 꽤 큽니다
이 동상은 얀 후스가 화형당한 지 500주년 되는 해인 1915년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후스가 체코 사람들에게 남긴 깊은 영향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체코의 개신교인 비율이 지극히 낮은 수준(4%)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깝고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광장에 가득한 관광객들도 후스 동상보다는 광장 주변의 화려한 성당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러한 진리에 대한 세간의 무관심을 책망하기라도 하듯, 동상 밑 부분에는 체코어로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진실을 사랑하고,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행하라.’ 과연 얀 후스는 그 말대로 실천하며 살았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영광스런 순교자 중 한 명인 후스지만, 그가 처음부터 개혁자의 길을 걸어갔던 건 아니었습니다. 원래 후스는 사제가 되어, 그저 안락하고 조용하게 살아가기를 꿈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섭리는, 그가 프라하 대학에 입학하기 이전부터 조금씩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후스가 대학교에 다닐 무렵, 프라하에는 이미 어느 정도 개혁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설교자들은 자국어(체코어)로 설교하고, 성경을 인용하면서 성경의 권위에 호소하였으며, 성찬을 집행할 때 떡만 나누지 않고 잔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된 데는, 1382년 보헤미아(지금의 체코) 왕의 여동생이 바로 영국의 왕과 결혼한 일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존 위클리프의 개혁 사상이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성사된 이 결혼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양국 사이가 가까워지면서, 학문 교류 역시도 활발하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 유학 온 보헤미아 대학생들이 위클리프의 책을 통해 깨우친 개혁 사상을 자기 고향에 전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니 후스도 프라하 대학을 다니면서 위클리프의 사상을 조금씩 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후스는 친구인 제롬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으로 개혁 사상에 눈을 뜨게 됩니다. 제롬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유학하던 중, 위클리프의 저서들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후스에게 위클리프의 책들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후스도 위클리프의 개혁 사상을 받아들이고, 조금씩 개혁에 속도를 내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 무렵, 후스는 프라하 대학교의 신학과 학장이 되어 학생들에게 강의하고 있었고, 동시에 베들레헴 교회에서 설교자로 부름을 받아 봉사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에서 성경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하고, 대학교에서 개혁 사상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후스는 점점 더 성경의 진리를 명확하게 이해하게 되었고, 동시에 교회 안에 있는 오류와 성직자 부패의 심각성도 더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얀 후스가 그렇게 개혁의 목소리를 조금씩 높여갈 때 즈음, 보헤미아는 사회적으로 별로 좋지 않은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특히, 로마 카톨릭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이 날로 커지고 있었습니다. 로마 교황청이 세금을 거두어들인 뒤에, 그것을 오로지 성직자의 향락과 사치를 위해서만 쓰고, 민중들의 삶은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얀 후스가 로마 카톨릭의 잘못된 교리와 사제들의 방탕하고 문란한 생활을 책망하는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그의 설교를 들은 민중들은, 꽉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듯한 시원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프라하에서 선포되는 후스의 설교는 점점 영향력을 더해가며 보헤미아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그가 말씀을 전했던 베들레헴 채플에는 매주 3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가 설교하지 못하게 된 1413년까지 그곳에서 10년 이상을 사역하는 동안 약 3천 번의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프라하 대학과 베들레헴 채플에서 진리의 깃발을 들며 거짓과 싸우는 후스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면서, 광장을 떠나 대략 20여 분 정도 걸어가자 베들레헴 채플(예배당)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베들레헴 채플은 후스에 관한 유물을 전시한 박물관도 함께 운영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곳에 가면 후스에 관한 많은 것들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득 안고 탐방 계획을 짰습니다. 그런데 막상 베들레헴 채플에 도착해보니,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문제 하나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행 책자에 나온 내용과는 달리, 입장료가 60코른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환전해 놓은 돈은 이제 40코른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도 없고 해서, 저는 직원에게 다가가서 저의 안타까운 사정을 말해보았습니다. “나는 이 책을 보고 왔다. 여기에는 입장료가 40코른이라고 나와 있다. 그래서 나는 딱 그만큼만 돈을 남겨놓았다. 내 수중에는 돈이 정말 이것밖에 없다.”라고 솔직하게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그 직원은 제가 딱해 보였던지 특별 할인을 해주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고등학생 입장료인 30코른만 내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어찌나 고맙던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놀랍게도 예배당 입구에는 한국어로 쓰여있는 안내서가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한국 사람들이 다녀가서 그런 것 같았습니다. 그 안내서에 따르면, 이 채플은 1391년에 세워졌고, 교구 관리 목적이 아닌 순전히 설교를 목적으로 세워진 건물이라고 합니다. 덕분에 당시 관습과 계급구조에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진리가 선포될 수 있어서, 체코 교회개혁의 선구자 역할을 잘 감당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뒤로 베들레헴 채플은 많은 풍파를 겪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회에게 넘어가서 로마 카톨릭 미사가 드려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19세기 초에는 완전히 무너져 폐허가 되기도 했고, 그 뒤에는 주거용 임대 건물이 그 자리에 들어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체코 공화국이 세워질 무렵 체코 정부와 역사가들의 노력으로, 1954년에 현재의 베들레헴 채플이 그때 당시의 모습과 비슷하게 재건축되었습니다.
현재 채플 옆에 있는 체코 공업대학이 예배당의 유지, 보수를 담당하고 있으며, 주로 예식장이나 공업대학의 졸업식 장소로 사용되거나 후스 서거일(1415년 7월 6일)을 기념하는 초교파 회의가 열리는 장소로 활용된다고 합니다.
바깥에서 볼 때와는 다르게 안으로 들어와 보니 예배당의 규모가 꽤 컸습니다. 예배당의 내부 구조는 안은 아주 단조롭고 간소했습니다. 이는 재건축할 때 의도적으로 내부 구조를 매우 단순하게 설계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설교단(說敎壇)의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았고, 회중석(會衆席)과의 거리도 매우 가까웠습니다.
출입구는 모두 4개가 있었는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모든 출입구의 위치가 설교를 최대한 방해하지 않게 설계되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만큼 설교의 비중을 높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처럼(삼상 16:7), 베들레헴 예배당은 외적인 화려함보다는 설교 중심의 단순한 내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얀 후스의 설교도 베들레헴 예배당의 모습처럼 단순하고 명료했습니다. 그는 “오직 구원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것이다. 따라서 교황이든지 사제든지 추기경이든지 성경 말씀에 반(反)한다면 그들을 따르지 마라.”라고 확신 있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마리아 숭배, 미신적 신앙, 성직 매매, 면죄부 판매 등을 비판하면서, 유일한 권위인 성경 말씀으로 교회를 개혁해 나갔습니다.
또한, 후스는 위클리프처럼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로 인해, 일반 사람도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체코어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나아가 그는 체코인의 민족의식을 깨우려고 노력했던, 사회적인 책임도 감당했던 개혁자였습니다. 그래서인지 후스의 종교개혁은 교리적인 개혁보다는 로마 카톨릭의 오류와 부패를 개혁하려는,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움직임이 좀 더 강했다고 평가받습니다.
비록 그의 개혁은 로마 카톨릭에 의해 중단되었지만, 그가 남긴 종교개혁의 불씨는 약 1세기 뒤에 마틴 루터에 의해 활활 타오르게 됩니다. 위클리프를 통해 영국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불씨가 그 아래 위치한 보헤미아(현재 체코)의 후스에게 전해지고, 그리고 그 주변 국가였던 독일의 루터까지 이르러 절정에 이르는 이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 예배당 벽에는 후스와 관련된 많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중에서 유난히 눈에 들어왔던 그림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그림이 무슨 의미인지 모른 채로 찍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후스에 관한 얇은 책 한 권을 읽고 그림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책에 따르면 프라하 도서관에는 위에서 언급했던 존 위클리프, 얀 후스, 마틴 루터, 이 세 명의 모습을 조각한 조각상이 진열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중 하나는 부싯돌로 불꽃을 일으키는 존 위클리프의 모습을 조각해 놓았고, 다른 하나는 그 불꽃으로 불을 붙이는 얀 후스의 모습을 조각해 놓았으며, 마지막 하나는 밝게 타오르는 횃불을 높이 든 루터의 모습을 조각해 놓았다고 합니다. 예배당 벽의 이 그림은 프라하 도서관의 조각상과 정확하게 같은 말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배당을 둘러보고 난 뒤에, 곧바로 2층 박물관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박물관의 규모는 예배당의 크기에 비해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후스가 그려진 그림들, 그의 저서, 그와 관련된 유물, 그리고 체코 교회 역사에 관한 사료와 유물들로 가득했습니다. 덕분에 저는 후시네츠에서 후스 생가를 관람하지 못했던 아쉬움을 이곳에서 달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대부분 설명이 영어로 되어 있어서 관람하기도 매우 편했습니다.
그렇게 박물관 이곳저곳을 관람하던 중에, 체코 학생들이 단체로 박물관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학생 대부분은 그냥 대충대충 훑어보면서 끼리끼리 모여 떠들고 노는 데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제 학창 시절이 생각나면서 좀 부끄러웠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도 체코의 위대한 인물에 관한 박물관인데 관심 좀 가져주지.’하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이윽고 관람을 마친 저는 박물관의 출구 쪽에 놓여있는 방명록에 기념으로 한 문장을 남겨두었습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방문했는지, 방명록에는 한글로 쓰인 문장들도 제법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관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면서, 제발 이곳만큼은 후시네츠의 얀 후스 생가처럼 폐쇄되지 않고 잘 관리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혹시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다시 한 번 오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민박집에 돌아와서, 다음 장소인 독일로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짧게나마 함께하며 정이 든 민박집 이모님께 작은 선물을 드리고 잠시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모님께서는 저의 유럽탐방이 하나님의 보호 하심 가운데 안전하게 이루어지기를 간구해주셨습니다.
헤어지는 일은 항상 많은 아쉬움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헤어짐은 끝이 아니라, 훗날 천국에서 다시 보게 될 때를 기약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모든 것을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아쉽지만 동시에 뿌듯한 마음으로 무거운 짐을 등에 둘러매고서, 다시 프라하 기차역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러면서 체코에서 보고 듣고 느낀 부분들을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 투쟁한 얀 후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성도들을 향한 그의 헌신과 사랑이 어떠했는지 마음속으로 가만히 그려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피 흘리며 싸우고 있는지, 그리스도의 몸 된 성도들을 가슴 깊이 사랑하고 있는지 돌아보았습니다. 그러자 ‘과연 나도 후스가 걸어갔던 그 좁은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정죄 받아 화형에 처해지기 전에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얀 후스는 옥중서신을 썼던 바울 사도처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이여! 감옥에 누워있지만 그것이 부끄럽지 않네. 이는 내가 주 하나님을 위해 소망 안에서 견디고 있기 때문이라네.”
참고한 도서들
1. 박양규, 『유럽비전트립1』, 두란노, 2011
2. 오병학 글, 주영광 그림, 『세계위인시리즈 동화만화2: 존 위클리프, 존 후스, 잔 다르크』, 은혜출판사, 1997
3. 이은선, 『종교개혁자들 이야기』, 도서출판 지민, 2013
4. 라은성, 『이것이 교회사다: 묻어둔 진리』, 페텔, 2013
5. 이지 오떼르, 『걸어서 가보는 프라하 종교개혁 이야기』, 김진아 옮김, 한국장로교출판사, 2012
6. 조병수, 『종교개혁 497주년 기념 강좌3 종교개혁의 선구자 보헤미아의 후스』, 신반포중앙교회, 2014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전 (PRE)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2-2) – 전 (PRE)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발자취를 따라서(프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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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자들의 삶을 드려다보면 그들의 뜨거운 열심과 담대한 믿음에 입을 굳게 다물게 됩니다. 그들의 땀과 핏값으로 지킨 것들을 소중하지 않게 다루는 제 자신이 부끄럽고, 그들이 복음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을 유럽 땅의 소식을 종종 들을 때 안타까움이 저절로 나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