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 강해
(10) 하나님의 언약
Geneva Reformed Church 제네바 개혁교회
Reformed Guardian 리폼드 가디언
The Band of Puritans 밴드 오브 퓨리탄스
Geneva Institute 제네바 신학교
오인용 목사
다 함께 구약성경 호세아서 1장 7절의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활과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마병으로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언약 교리에 관해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소요리문답 제12문은 “사람이 창조함을 받은 본 지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저를 향하여 섭리하시는 중 무슨 특별한 작정을 하셨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여기서 ‘특별한 작정’이라는 부분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성경은 기본적으로 약속, 즉 언약(言約)의 말씀입니다.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이라는 이름에서부터 그러한 사실이 잘 나타납니다. 성경의 언약은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이라는 두 가지 언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창세기 초반부에는 행위 언약이, 이후에는 은혜 언약이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 두 언약은 사람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역할을 하는 ‘생명의 언약’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이란 무엇입니까? 이 언약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을 다루기에 앞서, 우선 언약이 무엇인지부터 조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은 하나님과 사람이 맺은 약속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약속을 맺는 분이십니다.
물론,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동등한 입장에서 언약을 맺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은 더 높은 존재와 그보다 못한 존재 사이에 맺어지는 언약입니다. 이런 종류의 언약은 고대 중동 지역에서 왕과 지방 영주 사이에 맺어지곤 했던 언약과 성격이 같습니다. 그래서 고대 중동 지방에서 어떻게 언약을 맺었는지를 잘 살펴보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언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고대 중동 지방에서는 언약을 맺을 때, 더 높은 권세를 지닌 사람이 자신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 꼭 어떤 특정한 조건을 걸었습니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그 조건을 잘 지키면 언약을 지킨 것이 되어 약속된 혜택이 돌아갔습니다. 반대로 그 조건을 지키지 못하면 언약을 저버린 것이 되어 약속된 형벌이 돌아갔습니다.
신학교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깊이 있게 다루는 언약 신학이라는 과목을 아예 따로 편성해서 학생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 개혁주의 진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신학이 바로 이 언약 신학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람 사이에 맺어진 언약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구원 교리와 성경 전체의 맥락과 의도를 균형 있고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느냐 아니냐가 판가름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하는 결정적인 열쇠 역할을 하는 신학이 바로 언약 신학인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꼭 언약 신학에 관한 책을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행위 언약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행위 언약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맺으신 첫 번째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선악과를 따 먹는 ‘행위(행동)’를 언약의 조건으로 걸어놓으신 것입니다. 만약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으면, 그러한 행위에 걸맞은 형벌(죽음)이 내려지게 됩니다. 이처럼 행위 언약은 아담의 행위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첫 사람 아담에게는 이 언약을 지킬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담에게는 선악과를 거부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담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내가 동산에서 나는 다른 모든 것은 너에게 허락한다. 그러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는 따 먹지 마라.”라고 하신 말씀을 직접 듣고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므로 하와가 선악과를 그에게 건네줄 때 “이 열매는 하나님께서 친히 내게 먹지 말라고 하셨던 그 열매가 아닌가? 나는 이 열매를 먹지 않겠다.”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혜와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담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이런 종류의 죄를 가리켜서 ‘고범죄(故犯罪: 고의로 짓는 죄)’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짓는 죄에는 모르고 짓는 죄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담이 지은 이 죄는 그런 종류의 죄가 아닙니다. 아담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또 그 결과가 무엇인지 뻔히 다 알면서도 기꺼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자발적이고도 고의적으로 저버리고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범죄는 변명과 핑계가 조금도 통하지 않습니다.
아담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언약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된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그들을 쫓아내시면서 아담에게는 땀을 흘려 일해야 겨우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게 하셨으며, 하와에게는 끔찍한 출산의 고통을 겪게 하셨습니다. 또한, 많은 질병을 겪다가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참으로 좋은 것들을 많이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약속을 지키면 그것에 합당한 보상을 받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그것에 합당한 형벌을 받는 것이 바로 행위 언약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창세기의 역사성 문제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신학계에서 창세기의 역사성 문제는 논란을 상당히 많이 불러일으키는 주제입니다. 많은 신학자가 창세기 1장부터 3장까지의 내용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저 단순한 상징이나 전설, 혹은 신화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역사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특정 주제를 다루는 관점과 접근 방식은 셀 수 없이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그러나 신학계에서 아무리 다양한 의견이 난립한다고 해도, 창세기가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책이라는 사실이 변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창세기가 역사적인 기록이 아니라는 취지의 말과 글을 접한다면, 여러분은 그런 말과 글을 최대한 멀리하셔야 합니다. 이 문제는 성경이 참으로 사람이 믿고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인가 아닌가를 좌우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만약 창세기 1장부터 3장까지의 내용이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전설에 나오는 인물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실로 이상한 정신의 소유자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역사성을 부정(否定)하는 일이 치명적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둘째 아담으로 오셔서 세상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일은, 아담과 하와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증명해줍니다. 하와는 뱀의 꾐에 넘어가 선악과를 실제로 따 먹었습니다. 그런 다음, 아담도 하와가 넘겨주는 선악과를 받아먹었습니다. 이 일에 관한 성경의 진술은 윤리·도덕적 교훈을 주기 위해 꾸며낸 가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관한 역사적인 증언(證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꼭 역사적 관점으로 바라보며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칼 바르트 같은 현대 신학자나 근대 자유주의 신학을 물려받은 이들은 창세기 1장부터 3장에 나오는 내용을 신화로 취급합니다. 당시 중동 지역에 퍼져있던 전설을 누군가 수집하고 편집한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말을 늘어놓는 이들이 아무리 유명하고, 또 그럴듯하게 자기주장을 펼쳐간다고 해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창세기의 역사성을 확고하게 믿고 붙잡으십시오. 물론, 성경은 전체가 다 역사적 성격을 띠고 있는 계시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부터 3장은 더욱더 그러합니다. 그러니 여러분께서는 해당 내용을 철저하게 역사적인 사건에 관해 진술한 계시로 알고 계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일에는 손톱만큼도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충분히 언약을 지킬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두 사람 모두에게 책임을 물으셨지만, 하와보다는 아담에게 주로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행위 언약을 맺은 주체가 바로 아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와 때문에 요 모양 요 꼴이 되었다는 아담의 변명이 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아담이 하와가 건네주는 선악과를 거절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담이 “하나님께서 친히 내게 이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나는 이 열매를 먹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하와의 청을 끝내 물리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랬다면 아담은 죽음을 맛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직 하와만 멸망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끝까지 지킨 아담이 약속된 형벌을 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함께 선악과를 먹자는 하와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온 인류가 아담 안에서 함께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때 아담은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길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최종 선택은 그 반대였습니다. 그는 모든 사실을 다 알면서도 선악과를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하와의 말을 따르기로 마음을 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들으면 잠깐은 즐겁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과 행복은 길지 않습니다. 금세 재앙과 파멸로 바뀌어버리고 맙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기초 위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도저히 우리의 모든 것, 즉 우리의 생각이나 경험, 지식, 환경과 맞지 않더라도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 일이 잠깐은 우리에게 어려움과 고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과 고통은 눈 깜짝할 사이에 참된 기쁨과 영광으로 바뀌어 있게 됩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한눈을 팔면 어떻게 됩니까? 앞서 말한 것처럼 반드시 재앙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살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호되게 징계하셨습니까? 이런 사실이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해당하지 않습니까? 신약 시대는 구약 시대와는 다르게 말씀에 좀 불순종해도 하나님께서 다 은혜로 넘어가 주시는 것입니까? 그것이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란 말입니까?
이러한 생각은 마귀가 불어넣어 준 새빨간 거짓말이자,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을 욕되게 하는 지극히 망령된 생각입니다. 구약 백성이나 신약 성도나 모두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구약 백성과 신약 백성을 다르게 대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기 백성을 책망하고 징계하십니다. 그러한 책망과 징계를 받아본 이는 하나님의 엄위 하심을 깨우쳐 죄짓기를 두려워하고 멀리하는 일에 힘쓰게 됩니다.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는 사람의 사정을 봐주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죄를 정말로 버리느냐 아니냐에만 집중합니다. 사람은 적당히 하다가 넘어가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대충 넘어가 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와 책망은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참으로 버겁고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잘못을 저지르는 데도 아무런 책망이나 징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모든 것이 평안하고 순조롭습니다. 그렇게 소리소문없이 영원한 파멸에 이르고 맙니다. 이 세상에 그것보다 더 무섭고 끔찍한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하와의 말을 더 따른 아담의 범죄는 온 인류가 행위 언약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는 재앙을 불러왔습니다. 행위 언약의 저주는 인생의 존귀함을 모조리 갉아먹는 무시무시한 저주입니다. 그 저주 아래 놓인 사람은 늙고 병들고 지치다가 결국 숨이 끊어지고 맙니다. 그렇게 행위 언약의 저주는 세상의 모든 아름답고 좋은 것들을 허망하고 참담하게 만듭니다. 그 저주 아래에서는 참된 희망이나 기쁨이나 소망 대신, 칠흑같이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가 그들을 차례로 집어삼키는 일만 남아있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인 호세아서 1장 7절에는 그러한 비참한 인류의 상황을 바꿔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호세아서는 호세아 선지자의 아내 고멜이 자기 남편을 저버리고 떠났지만,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간음한 그녀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하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호세아서의 이 이야기는 유다 족속의 범죄와 택하신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다 족속은 하나님 앞에서 우상을 숭배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 감사하게도 그들을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참으로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사랑과 은혜가 한이 없으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공의롭기만 하셨다면,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두가 행위 언약의 저주 아래 파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갚지 않으셨습니다(시 103:10). 그 죄를 죄가 전혀 없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우신 이 구원의 언약이 바로 은혜 언약입니다.
은혜 언약과 행위 언약은 언약을 이행하는 주체와 성격이 서로 다릅니다. 행위 언약을 이행하는 주체는 사람이며, 사람의 행위에 초점을 맞춥니다. 언약을 지키거나 깨뜨리는 행위의 책임과 결과는 고스란히 그러한 일을 행한 사람의 몫이 됩니다.
그러나 은혜 언약을 이행하는 주체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행하시는 일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나님께서는 행위 언약 아래 있는 아담에게 온전히 책임을 물으셨지만, 은혜 언약 아래 있는 성도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으십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마땅히 내가 받아야 할 죄의 책임과 형벌을 대신 짊어져 주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의지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할 뿐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으며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해 해주신 일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속량하시려고 동정녀 마리아의 태를 빌어 사람으로 태어나신 일,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쏟으시고 돌아가신 일,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일에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 일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며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2011. 05. 04. ‘문경 십자가 죽음’ 사건). 경찰은 이 사건을 타살이 아닌 자살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사람이 왜 그런 식으로 생을 마감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사람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아, 내 죄가 너무 크고 무겁구나! 그러니 나는 이제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내 죄 문제를 해결해야겠구나.”라고 하면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참으로 갸륵하구나. 너는 십자가에 달려 네 죄를 스스로 처리했으니 어서 천국으로 가거라.”라고 하시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에게는 누군가를 죄에서 건져낼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죄인이 죄인을 구제하려고 나서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고 주제넘습니까? 죄인을 죄에서 건져낼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은 오직 의인(義人)에게만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 언약은 죄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할 뿐인 것입니다. 죄인이 자기 죄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은혜 언약의 밝고 환한 빛은 이미 구약 시대부터 이 세상을 비추어 주고 있었습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서부터 오늘 본문의 고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멸망해 마땅한 죄인에게 한없는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처지에 놓인 아담과 하와에게 친히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가려줄 이 가죽옷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잘 나타내줍니다.
고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멜은 호세아의 호의를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여자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할 더러운 여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고멜을 다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은혜로 그 여자를 죄와 사망의 늪에서 건져내어 온전한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고멜은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호의를 받을 만한 자격을 전혀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틈만 나면 이방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영적인 간음을 저질렀습니다. 이스라엘이 한 일이라고는 수치스럽고 더러운 일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이스라엘을 끝까지 붙들고 품어 주시리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이처럼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다른 방식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를 살아간 저들이나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나 다 똑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즉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그들도 아담 안에서 타락한 죄인이며 우리도 그러합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자격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그 무거운 죄와 사망의 올무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불의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함이 없는 은혜와 긍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이는 구원을 받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과 섭리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이제 이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타락한 죄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 결심하고 죄에서 돌이키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은 그 모든 노력을 허사로 만들 것입니다. 이겨내고 극복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더 흉악하게 날뛰며 저항하기를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아담과 하와 그리고 고멜처럼 죄짓기 좋아하는 타락한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증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우리 죄성과 무능력과 마주할 때마다 고개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께 나아가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렇게 그분의 은혜 앞으로 우리의 모든 죄악을 가지고 나갈 때야, 비로소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러한 악한 본성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못 박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행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타락하기 전의 아담보다도 더 고귀하게 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존재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죄에 넘어지고 굴복하여 무기력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겠습니까? 더는 머리 깎인 삼손처럼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되지 마십시오. 돌이켜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다시 일어나 나귀 턱뼈 하나로 천 명을 때려눕힌 삼손처럼, 온갖 죄와 악을 때려눕히는 의로운 용사가 되십시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하나님 믿는 성도를 시험하고 넘어뜨리려는 마귀의 활동이 극에 달해있습니다. 마귀의 시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러한 마귀의 궤계를 이겨낼 만한 힘과 지혜가 없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안일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그리스도를 가까이하기를 게을리하는 일을 가장 주의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어떤 상황에서든지 항상 예수님을 의뢰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고 해서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얼마나 허물과 실수가 많습니까? 사도 바울에게는 베드로에게 있었던 결점이 없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원래 예수님 믿는 사람을 핍박하여 죽게 하는 데 누구보다도 큰 열심을 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을 그토록 거룩하게 만든 능력은 어디에서 말미암은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는 그 은혜 안에서 평생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죄를 이겨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준다는 소리나 그런 종류의 집회를 절대로 가까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죄를 이겨내는 힘은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함에서 나오는 것이지, 은사와 기적을 추구함으로써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허탄한 말에 귀 기울이지 말고 오직 영광스러운 생명의 언약,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빛나는 은혜 언약을 믿고 따라가십시오.
「내가 유다 족속을 긍휼히 여겨 저희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
여러분, 이 말씀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이 은혜를 따라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 앞으로 어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바라고 요구하시는 일은 오직 그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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