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역정의 크리스천과 함께 천성을 향해 나아가자
(9) 율법과 복음
김재호
▲『천로역정』의 율법과 복음을 표현한 윌리엄 블레이크의 판화
「이윽고 해석자는 직접 크리스천의 손을 이끌고 어떤 매우 넓은 객실로 데려갔는데 그곳은 여태껏 한 번도 청소를 하지 않아서 온통 먼지투성이였다. 해석자는 잠시 동안 그곳을 둘러보더니 하인을 불러 청소를 하라고 시켰다. 그래서 하인이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을 때 어찌나 먼지가 많이 일어나는지 크리스천은 거의 질식할 정도였다. 그러자 해석자는 옆에 서 있던 한 소녀에게, ‘물을 이리로 가져다가 뿌려보아라.’ 하고 일렀다. 그 소녀가 물을 뿌렸을 때 먼지는 가라앉아서 마침내 방은 말끔히 청소되었다.」1
죄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는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해 좁은 길과 문으로 향하려고 발버둥을 친다. 가족이나 친지의 만류, 또는 육신의 안위나 고난과 절망이 그 발버둥을 멈추게 할 수 없다. 참 생명을 얻기까지는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러한 과정을 지나는 이들의 내적인 상태는 어떠할까?
우선, 그들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 여태껏 한 번도 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일들이 정말로 죄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았고, 심지어 달콤하기까지 했던 일들이 생전 처음으로 뼈아프게 다가온다. 그들은 자기 악함에 매우 놀라면서 곧장 그 악한 일들을 끊어내려고 애쓰는 길로 나아가지만, 그 모든 노력은 얼마 못 가서 죄다 실패로 돌아간다.
사람의 타락한 심성은 어떤 일이 악하니까 하지 말라고 하면, 더욱더 강렬하게 그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신의 죄에게 ‘봐라, 너는 악한 죄악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하고 이쯤 해서 죽어줘야겠다.’라고 하면, 죄가 그냥 순순히 죽어주겠는가? 그렇지 않다. 사람이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만큼 그 사람의 죄도 살려고 발버둥을 친다.
그 결과, 그들은 자기 악함과 비참함을 진정으로 맛보게 된다. 그전까지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악하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처참한 실패를 계속 겪으면서, 자신이 정말 그렇게까지 악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고 인정하게 된다. 사람은 그 지점에 이르러서야 하나님의 심판이 참으로 공의롭고, 자신은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겨우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참으로 깨닫고 이해한 이들은 정말로 온 힘을 다해 발버둥을 치기 시작한다. 죄도 살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발버둥을 치듯이, 그도 죄로 멸망하지 않기 위해 목숨을 다해 발버둥을 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그들을 비난하면서 정신이 나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오해와 비난을 무릅쓰고서라도 기꺼이 좁은 길과 문을 향해 힘껏 나아가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심령이 평안하고 안정된 상태는 아니다. 그들은 좁은 길을 향해 힘껏 발을 내디디면서도 한층 더 강렬해진 죄를 향한 탐닉에 늘 시달린다. 그런 탐닉을 물리치기 위해 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그들의 심령은 종종 빈사 상태에 가까운 영적 고통을 맛보게 된다.
그들의 심령은 죄의 무게로 심하게 짓눌리며, 그런 짓눌림과 있는 힘을 다해 싸우다 보면 종종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력을 완전히 소진하곤 한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그런 상태에서조차도 조금씩이나마 발을 놀려 그리스도를 향해 계속 나아간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이가 죄의 깊이를 이렇게 극심하게 맛보지는 않는다. 경건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은 이런 과정을 훨씬 순탄하고 덜 고통스럽게 넘어가기도 한다. 다시 말해, 이런 과정 가운데서 일어나는 감정적 반응의 강도나 세기를 기준으로 삼아 이런 일의 진정성과 건전성을 가늠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죄 중에 태어나는 사람은 율법을 통해 죄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즉 전인격적으로 경험하는 일을 피해갈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종류의 경험이 크든지 작든지 다 존재한다. 만약 어떤 이가 이런 종류의 일을 근본적으로 경험해본 적이 없다면, 그는 아직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이다. 마치 율법이 이르기 전에는 아무도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던 것처럼, 정말 사망의 자리에 이르기 전에는 은혜를 은혜로 여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죄가 없으면 은혜도 없다. 죽지 않으면 새롭게 태어나는 일도 없다.
성경은 이러한 율법의 역할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전에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내가 살아 있었으나 계명이 이르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 죄가 계명으로 말미암아 기회를 타서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다. 이렇게 보면 율법도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 그러면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 오히려 죄가 죄로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죄가 그 선한 것으로 말미암아 내게 사망을 가져왔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가 더욱 죄 되게 하려는 것이다(롬 7:9~13, 바른 성경).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매였으며, 장차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혀 있었다. 그리하여 율법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가정교사가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다(갈 3:23, 24, 바른 성경).」
이처럼 율법은 죄를 심히 죄 되게 하여, 그 사람이 처해있는 현실의 참담함과 긴급함을 있는 그대로 깨우쳐준다. 하지만 그 죄를 해결하고 이겨낼 방법과 능력까지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율법이 본래 역할을 잘 감당하면 할수록 죄인의 심령은 더 상하고 무너진다. 살기 위한 발버둥과 간절한 애원이 그 심령 밖으로 터져 나오게 된다. 그러나 그 이상은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상태가 계속 지속된다면 아무리 밝게 타오르던 심지도 다 꺼져버릴 것이고, 아무리 튼튼한 나무라고 해도 다 꺾여버릴 것이다. 절망과 암흑과 공포만이 남을 것이며, 모두가 탈출구를 찾다가 결국 기진해 숨을 거두고 말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감사하게도 ‘은혜’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역설적이게도 성경은 율법보다 은혜의 약속이 먼저라고 증거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은혜의 약속을 믿게 하시려고 그의 억센 자아를 율법으로 꺾으시고 내리치셨다는 뜻이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엄하게 매를 대어 결국 고집을 꺾어놓는 것처럼 말이다. 참 사랑으로 매를 드는 부모는 매를 들고 난 뒤에 아이를 그냥 그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항상 아이에게 먼저 다가가서 아이의 멍든 종아리를 보듬어주면서, 매를 들었던 사랑으로 아이의 상한 마음을 위로해준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이니,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폐기하여 그 약속을 무효로 할 수는 없다(갈 3:17, 바른 성경).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많아지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으니, 이는 죄가 사망으로 다스린 것같이, 은혜도 의로 말미암아 다스리므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다(롬 5:20, 21, 바른 성경).
율법이 육체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었던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으니, 곧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체의 모양으로 보내셔서, 그 육체 안에서 죄를 심판하신 것이다(롬 8:3, 바른 성경).」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절망과 비참함 속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다. 사방이 깜깜해지고 살 희망과 이유가 모두 끊어진 것만 같은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상하고 깨진 마음에 은혜를 끝없이 불어넣어 주신다. 깊이 낙망하여 무너진 심령, 이제는 죽음밖에 남지 않은 꺼진 불꽃 같은 심령이 내가 받아야 할 진노의 잔을 대신 마셔주시기를 기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바라보고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율법의 사망선고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 무덤 밖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의 손과 발을 싸고 있던 천과 얼굴을 가리고 있던 수건이 그리스도의 그 은혜로운 부르심 앞에서 힘없이 벗겨져 땅에 널브러진다.
그는 은혜의 자유 속에서 하나님의 법을 기쁨과 자원함으로 지키기를 힘쓰는 거룩한 사람이 되며, 그 은혜 안에서 계속 자라간다. 더는 살기 위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새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열심히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된다. 그 은혜가 날마다 그의 심령을 새롭게 하여 날이 갈수록 죄를 이겨내게 한다. 그는 이제 무기력한 죄의 노예가 아니다.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용사로서 다시 태어난다.
이처럼 율법과 복음은 분리할 수 없는 한 쌍으로 이루어진 진리이다. 율법만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이 없고, 복음만 선포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한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이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법을 한없이 엄하고 단호하게 선포하며 가르쳐야 한다. 어물쩍 타협하고 물러서면, 타락한 사람의 마음은 오히려 그 틈을 악용하려고 들 뿐이다. 타락한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소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완전한 사망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심령이 무너져 정말로 죽어가는 이들에게는 무한한 은혜와 긍휼로 그들을 붙들어주시는 그리스도를 있는 힘껏 바라보라고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자기 죄로 인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는 은혜로우신 분이심을 바라보고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나아오라고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되, 동시에 그 진노 안에서 죽어가는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외쳐야 한다. 어느 한 편만 유달리 강조하면 안 된다. 그러면 영혼들은 크게 상처를 입고 그리스도 밖에서 이리저리 방황하거나, 반대로 무늬만 그럴싸한 거짓 신자만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게 된다.
우리는 율법으로 시작하여 복음으로 끝맺는 법을 잘 배워야 한다. 둘 다 있는 그대로 가르치고 선포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 일을 균형 있게 잘 감당할 때, 성령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신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각주
1 존 번연,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 유성덕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포켓판, p.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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