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 강해
(8) 사람의 창조
Geneva Reformed Church 제네바 개혁교회
Reformed Guardian 리폼드 가디언
The Band of Puritans 밴드 오브 퓨리탄스
Geneva Institute 제네바 신학교
오인용 목사
창세기 1장 26절과 27절, 이 두 절을 한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소요리문답 제10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지으셨습니까?”라고 물어봅니다. 창세기 1장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잘 나와 있습니다. 성경은 인류 기원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증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만물과 인류의 기원이 어떻게 되는지를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철학, 과학, 인류학을 비롯한 그 밖의 여러 학문들에서는 인류 기원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말을 늘어놓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진화론입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세상 사람들은 이 진화론을 많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타임 지(誌)가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을 선정할 때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항상 1, 2위를 차지하는 이들이 바로 다윈과 마르크스입니다. 그런 결과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윈과 마르크스의 사상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여전히 큰 환호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모든 생물과 인류 기원 문제를 진화론으로 설명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진화론은 인류나 생명의 기원에 관해 분명한 실체적 진실을 제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진화론이 이토록 큰 지지를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진화론을 포기하면, 대안이 창조론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이 하나님을 인정하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다른 모든 것은 받아들일 수 있어도, 하나님에 관한 것만큼은 최대한 배척하려고 애를 쓰는 곳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모두 다 학교에서 진화론을 배웠습니다. 그때, 우리가 배웠던 교과서에는 ‘인류 진화 계통도’라는 그림이 버젓이 실려 있었습니다. 단세포에서 출발하여 반(半)은 원숭이인 유인원에 이르고, 점차 오늘날의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그려 놓았던 그 그림 말입니다.
수십 년 동안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쳐왔기에, 오늘날 사람들은 별생각 없이 “아, 사람은 이렇게 진화의 과정을 거쳐 이 세상에 나타났구나.”라고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와 같은 헛된 생각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반대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27절을 보면 그 이유가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바로 이 말씀 때문에 우리가 진화론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진화나 그 외 어떤 여러 가지 방법이나 과정을 거쳐 이 세상에 나타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어쩌다 보니 우연히 생겨난 맹목적인 존재로 여겨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또, 사람을 기계적인 존재로 여겨서도 안 됩니다. 만일 사람이 우연히 나타난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존재라고 한다면, 인생은 살아야 할 의미와 가치가 별로 없습니다. 그냥 살다가 살기 싫어지면 자살해도 딱히 문제 될 게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죽인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런 존재에게는 고유한 인격적 속성에서 말미암는 존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가 자라난 시골은 이맘때가 되면, 논이나 연못이 개구리 알로 가득해집니다. 그 동글동글한 개구리 알, 수천수만 개가 천지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그 알에서 새까만 올챙이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깨어나고, 그 올챙이는 개구리로 자라납니다.
저는 어릴 때 그 개구리를 잡으러 다니면서 보낸 시간이 참 많았습니다. 개구리를 많이 잡으려고 제 나름대로 사냥 도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못 쓰는 우산에서 우산살 하나를 꺾어낸 뒤에, 그 끝을 돌에 뾰족하게 갈아냅니다. 그런 뒤에, 볼펜 대와 우산살을 고무줄로 연결해줍니다.
사용법은 새총이나 작살과 비슷합니다. 먼저 사냥할 개구리를 한 마리를 고릅니다. 그런 다음, 한 손으로 볼펜 대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우산살을 잡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산살을 힘껏 뒤로 잡아 당겨줍니다. 우산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면, 우산살은 목표로 삼은 개구리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갑니다. 이내 그 우산살은 개구리의 몸통을 꿰뚫습니다. 저는 그런 방법으로 개구리를 정말로 많이 잡았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개구리가 아니라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정말 끔찍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그런 일이 오늘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낙태로 생명을 잃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낙태를 행하는 이들은 태아의 생명을 마치 제가 개구리를 잡던 것처럼 다룹니다.
여러분은 낙태를 반대하는 영상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 영상에서, 태아는 의사의 손에 들린 무시무시한 낙태 기구를 피해서 막 이리저리 도망 다닙니다. 그러나 이내 그것에 의해 온몸이 짓뭉개지고 맙니다. 그런데도 낙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건 사람이 아니다. 그건 그냥 배 속에 있는 어떤 생물체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것을 어떻게 하든지 말든지는 순전히 내 자유이다. 그러니 내게 이러쿵저러쿵하지 마라.」
그러나 사람은 어머니 태 안에서 다세포에서 사람으로 급속(急速)하게 진화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태어난 아이의 키가 자라고 머리가 굵어지게 하시는 것처럼, 태아(胎兒)의 손과 발도 자라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낙태와 개구리 사냥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태아에게는 처음부터 영혼이 존재하지만, 개구리에게 영혼이 있었던 순간은 단 한 순간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문화적 주도권을 쥐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드라마와 가요와 영화와 책과 옷을 만들어 냅니다. 또한, 사람들은 그런 문화를 보고 즐기며 열광합니다. 그 결과, 우리 시대 문화에서는 사람의 존귀함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우리 시대 문학이나 영화를 한번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사람을 죽이고, 자살하며, 마약을 복용하고, 성적인 죄를 저지르는 추악한 모습이 아무렇지 않게 그려집니다. 이처럼 우리 시대는 사람에게 거는 기대 자체가 많이 낮아져 있습니다. 이 세상은 사람들에게 돈 많이 벌고, 크게 출세하며, 멋있게 살고, 젊음과 행복과 쾌락을 누리는 삶 이상을 바라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참으로 존귀한 존재라고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창 1:27).」
여러분, 사람의 존귀함이 어디에 근거합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기에 사람이 존귀한 것입니다. 만약 신앙이 없는 생물학자 다윈의 말이 정말 옳다면, 사람은 절대로 존귀한 존재가 아닙니다.
진화론은 사람이 우연히 이 세상에 나타난 존재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정말 우연히 생겨난 존재라면, 우리 삶에는 그 어떤 존재 이유나 목적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우연히 생겨났다가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참으로 허무한 존재가 됩니다. 우연이라는 먹구름이 사람의 존귀함을 다 삼켜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어쩌다가 나타난 존재가 아니라, 분명한 목적과 계획 가운데 창조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많은 이가 이 본문에서 말하는 ‘우리의 형상’이라는 말의 뜻을 궁금해하곤 합니다. 먼저 ‘우리’라는 단어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형상’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인격적 본성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말의 뜻은, 삼위 하나님께서 사람처럼 눈, 코, 귀와 같은 형상을 지니신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말은 사람이 하나님의 인격성을 따라 지어진 영적이고 도덕적인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하나님은 인격적인 교제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여타 짐승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입니다. 사람은 사자, 코끼리, 호랑이, 뱀, 개, 돼지와 같지 않습니다. 그런 짐승들에게는 사람에게 있는 인격적 속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짐승들은 사람과는 다르게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나 돼지를 예배당에 끌어다 앉혀 놓는다고 해서, 그 개나 돼지가 “아, 하나님께서 참으로 살아계시는구나.” 하면서 사람처럼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설령 참된 믿음이 없는 불신자라고 해도, 어떤 종교적 감각이나 초월자에 대한 경외심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종교가 없는 사회나 민족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존재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그 존재를 숭배하려고 합니다. 물론, 타락한 인류는 성경의 가르침이 없으면 그 존재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인은 돌이나 나무에 어떤 형상을 새긴 다음에 그것을 자기 하나님으로 섬기며 숭배합니다. 비록 죄의 영향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절대적인 초월자의 실재를 감지하고 그 존재를 숭배하려고 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해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영혼과 육체를 지닌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영혼만 지닌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육신도 있습니다. 우리 사람은 천사와 같은 영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천사에게는 우리와 같은 육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빚어 만드셨기에 사람에게는 영혼과 육체가 함께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을 그와 같은 존재로 만드셨을까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려고 하셨기 때문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하면서, 보이는 이 세상이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하도록 가꾸고 관리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26절 말씀의 끝 부분을 살펴봅시다.
「그(사람)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이처럼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위와 능력과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여러분, 동물원에는 코끼리도 있고 사자를 비롯한 동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은 그곳에 없을까요? 사람도 육체를 가진 동물이 아닙니까? 그러니 동물원 한쪽에 사람을 위한 공간도 마련해놓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그런 데 가두어 놓고 사육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권위 있게 지으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이 세상 모든 만물을 잘 다스려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런 최고의 권위를 사람이 아닌 코끼리에게 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면 아마도 사람이 동물원 우리 안에 들어가 있고, 코끼리가 울타리 바깥을 거닐면서 사람을 구경하고 다닐 것입니다. 또 만일 원숭이에게 최고의 권위를 부여하셨다면, 원숭이가 사람에게 바나나를 던져주면서 먹어보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가치를 지닌 존귀한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만한 가치와 능력을 부여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그 탁월한 지위와 가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지 않으면, 그 가치가 완전히 땅바닥에 떨어져 거의 짐승 수준으로까지 낮아집니다. 지성인이든지, 박사든지, 유명인이든지, 부자이든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다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설령 가난한 사람이든지, 배우지 못한 사람이든지, 가장 천한 사람이든지 다 존귀한 자들입니다. 로이드 존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왕을 만나기보다는 하나님을 믿는 농부와 만나서 교제하는 게 더 좋다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설령 어떤 사람이 왕이라고 해도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별 볼 일 없는 사람입니다.
2011년에 윌리엄 영국 왕세손이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영국 국교회 체계에 따르면, 국교회 전체를 이끌고 가야 할 권위와 책임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바로 영국 왕입니다. 그래서 영국 국교회는 영국 왕에게 ‘믿음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영국 왕실 사람들은 전혀 신앙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의 영국 여왕이 세상을 떠나면 찰스 왕세자가 그 왕관을 물려받게 됩니다. 그러나 찰스 왕세자가 보여주는 말과 행동은 참으로 가관입니다. 그는 “이제는 성공회만이 영국의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슬람교를 포함한 타종교도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수많은 여성과 어울리며 염문을 뿌리고 다닙니다.
이처럼 영국 왕실은 신앙의 외적 형식만 물려받았고, 참된 경건은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왕실에서 나고 자란 왕세손이 어떻게 신앙을 갖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런 왕실 사람과 교류하느니, 차라리 하나님을 믿는 거지와 교류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여러분,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나사로는 아주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브라함의 품,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참으로 존귀한 사람입니다. 한편, 하나님을 믿지 않은 부자는 이 세상을 참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으면서 물 한 방울을 애걸하는 참으로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존귀함은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을 의뢰함으로써 존귀해집니다.
하나님께 예배와 찬송을 드리고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것보다 더 뛰어나고 존귀한 삶은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숙여 그분께 기도하며, 그분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순종하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일을 절대로 부끄러워하거나 수치스러워하면 안 됩니다. 누가 우리 신앙을 비웃고 멸시하며 모욕한다고 해도, 절대로 뒤로 물러서면 안 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 믿는 사람을 욕하고 비방하며 비난하기를 좋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들은 하나님을 믿는 일을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그들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기에, 그 존귀한 일을 대적하며 대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다는 이 창조의 교리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친히 창조하셨구나.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 주인이시자 존재의 근원이 되시는구나.”라고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의 수많은 이가 아무 생각 없이 진화론을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실제로는 성경이 증거하는 창조 교리를 포기하고 타협하는 일인 줄도 모른 채로 말입니다. 많이 배우고 학식이 있는 사람일수록 자기 존재의 근원을 아주 오래전에 우연히 생겨난 어떤 세포에 두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기 존재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지 않습니다. 그 일이 얼마나 귀한지 알지 못합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사실 자체를 어리석은 생각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런 말을 하는 이들을 미워하고 싫어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그런 태도와 생각은 그를 개나 돼지 같은 짐승과 다름없게 되는 깊은 구렁텅이로 끌어가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소요리문답 제10문을 통해 인간의 창조에 관해 배웠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지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 즉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친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너희 사람아, 너희가 어떻게 이 땅에 나타나게 되었는지 아느냐, 누가 너희를 지었는지 알고 있느냐? 나, 곧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너희를 만들어 이 땅에 존재하게 하였다.」
우리는 바로 이 말씀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말씀을 따라 그분을 경외하며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그분의 말씀을 좇아 가장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방 종교인처럼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무엇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뜻이 계시된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분을 알고 믿으며 사랑하기를 배워가야 합니다.
우리는 인류 기원에 관한 세상의 온갖 헛되고 미련하며 거짓된 이론과 문화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그런 소리들은 우리 영혼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결국 어떤 지경에 이르게 됩니까? 아주 캄캄한 어둠 속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더는 그를 붙들어주거나 도와줄 수 있는 이가 없는 곳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이 땅에서 끝까지 하나님을 안 믿고 죽은 이의 마지막이 그와 같습니다. 캄캄한 흑암 가운데서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안 계신 곳, 실오라기 같은 빛 한 줄기조차 없는 그곳에서 영원히 거하게 된다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하고 무섭습니까?
여러분, 빛이 되시는 우리 주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녀 삼아주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존귀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라는 사실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인데, 그분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셨다니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시기를 기뻐하셨기에, 우리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그분의 존전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소 모자라고 부족한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머뭇거리고 쭈뼛거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영원히 친자녀처럼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장차 그 존귀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보좌 앞에서 영원히 밝고 영광스럽게 살아갈 소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수많은 불신자들은 자기 죄로 인해 영원한 흑암과 비참함 속에 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 이 진리를 마음속 깊이 새겨두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며 살아가십시오.
앞으로도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주님을 찬송하는 일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면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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