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전 (PRE)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2-3) – 전 (PRE)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발자취를 따라서(콘스탄츠)
설형철
▲ 독일 보름스의 종교개혁 기념비에서 볼 수 있는 얀 후스 동상
이번에는 얀 후스가 생애 마지막 무렵에 남긴 흔적을 살펴보고, 그것으로 그에 관한 탐방기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로마 카톨릭의 어둠과 부패에 대항하여 싸웠던 후스는 결국 화형으로 그의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화형당한 곳은 그의 조국 체코가 아니라 독일 남부에 있는 ‘콘스탄츠’라는 도시입니다.
이 탐방기 연재는 후스의 생애에 맞추어서 진행되고 있지만, 실제 탐방과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국을 떠나기 전에 탐방 경로를 독일에서 체코로 이동하는 방향으로 잡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후스의 마지막 순간부터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로마 카톨릭이 후스를 이단으로 정죄한 콘스탄츠 공의회가 열렸던 장소부터, 그를 감금했던 장소, 화형을 확정했던 곳,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순교했던 곳을 차례대로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삶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영광의 흔적들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후스가 어떻게 콘스탄츠 공의회에 불려갔는지부터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가 태어나기 60여 년 전인 13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그때 프랑스의 필리프 4세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크고 작은 일로 서로 다투며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둘 사이의 분쟁이 극에 달했을 무렵, 필리프 4세는 보니파키우스를 로마 교외의 아나니에서 습격하여 며칠간 납치하는 일을 벌였습니다. 그 충격 때문이었을까요? 교황은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고 맙니다. 그러자 필리프 4세는 프랑스 사람 하나를 직접 교황으로 천거하고 밀어주어서, 결국 그가 새로운 교황 자리에 앉을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 새 교황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로마에 있던 교황청을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기게 합니다. 그것으로 교황은 사실상 프랑스 왕의 지배 아래 있게 됩니다. 이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아비뇽 유수(幽囚)’입니다.
그러나 이를 줄곧 못마땅하게 여긴 로마의 추기경들이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결국 1377년에 교황과 교황청은 다시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렵사리 돌아온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바로 그다음 해인 1378년에 숨을 거두면서 일대 혼란이 벌어지게 됩니다.
로마의 추기경들이 그레고리우스 11세의 후임을 이탈리아 사람으로 선출했지만, 프랑스 추기경들은 이에 반발하여 프랑스 사람 한 명을 대립 교황(對立敎皇)으로 추대하고 아비뇽에 다시 교황청을 열었습니다. 그로 인해, 로마 카톨릭은 같은 하늘 아래 교황이 2명 존재하는 이른바 ‘대분열 시대(1378-1417)’로 접어들게 됩니다.
이에 로마 카톨릭은 1409년에 프랑스 피사에서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끝낼 목적으로 종교 회의를 열었습니다. 그 회의에서는 그때까지 서로 맞서고 있던 두 교황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난 뒤 새로운 교황을 선출했습니다. 그러나 아비뇽과 로마의 교황들이 그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회의 결과를 무시해버리고 계속 자기의 교황권을 주장했습니다. 그 결과, 무려 3명이 서로 자기에게 교황권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다투는 점입가경의 난장판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대분열과 혼란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 1414년에 콘스탄츠에서 다시 한 번 종교 회의가 열리게 됩니다. 이 공의회에서는 교황 3명 모두가 폐위되었고, 그들을 대신한 새 교황이 선출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로마 카톨릭 역사상 가장 우스꽝스러웠던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사상을 이단 사설(邪說)로 정죄하고 뿌리뽑기 위해 애쓰는 어처구니없는 일은 계속 막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 회의에서 로마 카톨릭은 교회를 개혁한다고 하면서 이미 소천한 위클리프의 시신을 무덤에서 파내어 불태우고 재를 강에 버리는 만행을 결의하고 시행했습니다. 또한, 그의 개혁 사상을 이어받은 얀 후스도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이단으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이 콘스탄츠 공의회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지기스문트가 피사에서 교황으로 세워진 요한 23세의 허가를 받아 개최한 종교 회의입니다. 지기스문트는 당시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얀 후스에게 신변안전을 보장해줄 테니, 안심하고 공의회에 참석하라고 그를 설득합니다. 후스의 친구와 그를 아끼는 주변 사람들은 공의회에 참석하지 말라고 후스를 말렸습니다 그러나 후스는 겁먹지 않고, 자신이 믿고 있는 진리가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하기로 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콘스탄츠까지 약 600km 정도 되는 거리를 거의 3주 동안 걸어서 회의장에 이르게 됩니다.
후스는 600km나 되는 먼 거리를 걸어서 이곳에 왔지만, 저는 비행기와 기차라는 문명의 발달로 인한 유익을 누리면서 편하게 콘스탄츠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조금 무거웠습니다. 그가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를 보러 와서 그런지,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마음 때문이었을까요?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콘스탄츠 공의회가 열렸던 건물이 뭔가 조금 무겁고 음산하게 비쳤습니다. 여행 책자를 펼쳐보니 그 건물의 1층은 현재 레스토랑으로 운영되고 있고, 공의회가 열렸던 2층은 거의 사용을 하지 않는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건물 주변으로는 화단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고, 분수가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내는 중이었습니다. 또 근처에는 호수가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는 데다가 마침 날씨도 너무 화창해서, 순간적으로 휴양지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콘스탄츠 공의회에는 약 5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모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들도 나름대로 교회를 개혁하려는 열심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진정한 교회 개혁을 외쳤던 한 사람을 도리어 정죄하는 잘못된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참된 교회 개혁을 부르짖었던 얀 후스는 콘스탄츠에 도착한 지 며칠이 못 되어, 로마 카톨릭 추기경들에 의해 강제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후스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지기스문트 황제가 했던 신변보장 약속에 호소했지만, 후스는 결국 풀려나지 못했습니다. 그 겁쟁이 황제가 후스의 개혁 사상이 공의회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낀 뒤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후스를 계속 감싸다가 자신도 이단의 지지자로 몰리는 상황을 맞을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저는 아름다운 주변 환경과는 사뭇 다른 사람의 타락상 앞에서 잠시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러고 난 뒤, 후스를 가두어 두었다고 전해지는 슈타이겐베르거 인젤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이 호텔이 세워지기 오래전, 이 자리에는 수도원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스는 바로 그 수도원 감옥에 감금되었습니다. 물론, 후스는 한 곳에만 갇혀 지낸 것이 아니라 여러 번(3번 정도) 이감(移監)되었다고 전해지기에, 이곳이 후스가 몇 번째로 머물렀던 감옥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곳에는 그가 머물렀던 흔적들이 조금이지만 분명하게 남아있었습니다.
이 호텔은 후스가 갇혀 있었던 방을 보존하고 꾸며서, 여행객이 묵어갈 수 있는 객실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비록 그 방 안에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호텔 앞쪽에서 겉모습은 얼마든지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 후스가 갇혀 있었던 방 – 새송이버섯처럼 생겼습니다.
밖에서 볼 때, 그 방은 그다지 크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지금 보면 정말 아담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방이지만, 그 당시 이곳은 얼마나 차갑고 외로운 곳이었을까요? 후스가 여기에 갇힌 채 많은 것을 생각하고 고민했던 것처럼, 저도 저 방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룻밤 묵어간다면 참 좋은 시간이 될 듯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배낭여행객 처지에 감히 호텔이라니요? 먹는 것도 대강 때우고 아끼면서 이러 저리를 돌아다녀야 하는 배낭여행객에게 호텔이란 그저 먹기 좋은 그림의 떡과 같을 뿐입니다.
또한, 이 호텔은 한쪽 벽면에 후스를 그려놓았습니다. 배낭여행객에게 금지구역과도 같은 호텔에 제가 온 이유도 바로 그 벽화를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호텔 입장에서는 그런 제가 별로 달갑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호텔 입구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과는 다르게 호텔 프론트에 있던 여직원 한 분이 아주 밝은 모습으로 저를 맞아 주었습니다. 제가 “후스가 그려져 있는 벽화를 볼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보았더니, 그 직원은 마치 제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안으로 들어가면 볼 수 있어요.”라고 하면서 친절하게 위치를 안내해주었습니다. 아마 저 말고도 그 장소를 찾아오는 사람이 꽤 있었나 봅니다.
하지만 그때는 점심때와 가까웠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주 향기로운 음식 냄새가 살살 제 코를 자극해오기 시작했습니다. 아, 배는 고픈데, 몇몇 사람이 호텔 식당에 둘러앉아 맛있게 식사를 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 배고픈 참새는 ‘그냥 식당으로 달려가 버릴까?’라는 헛된 생각을 물리치면서, 방앗간 옆을 그냥 지나가야만 했습니다.
맛있는 음식보다 더 보고 싶었던 그 벽화는 곧바로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뜻밖에 찾는 데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한 5분 정도 벽화를 찾아다녔을까요? 드디어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후스가 그려진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 후스의 벽화 – 벽화 오른쪽의 나무문과 크기를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림의 크기가 꽤 크다는 사실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림을 보고 처음 느꼈던 것은, 그림을 너무 잘(좋게) 그렸다는 것이었습니다. 뭐랄까…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 않는 후스의 표정과 생각보다 깨끗하게 표현한 감옥의 상태가 조금 의아했습니다. 아마도 실제 현실은 그림보다 훨씬 더 침울하고 어두웠을 것입니다. 제가 참고했던 종교개혁 여행 책자에는 ‘후스는 이곳에 감금당했을 때 손과 발에 너무 단단히 족쇄가 채워져서 움직이기만 하면 피부에 큰 상처를 입었다.’라고 적혀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마치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성도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처럼, 보헤미아(체코)에 있는 성도에게 편지를 보내어 믿음 안에서 그들을 격려하고 권면해주었습니다. 최근에 얀 후스의 전기(후스에 대한 첫 번째 탐방기에서 언급했던)가 드디어 발행되었는데, 그 책에 실린 그의 옥중서신을 보면 그가 어떤 심정으로 편지를 썼는지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내가 하나님의 진리를 퇴보시키지 않도록, 그리고 증언자들이 나를 잘못 증언하는 거짓을 인정하지 않도록 나는 옥중 철장 안에서 차꼬에 차여 재판으로부터 사형 판결을 기다리며 이 편지를 여러분에게 썼습니다. ……(중략)…… 서로 사랑하도록, 폭력으로 선한 사람들이 억압당하지 않도록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진리가 있도록 하십시오.」
또한, 후스는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로 무려 7~8편이나 되는 소책자를 썼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많은 서신서를 작성했듯이 말입니다. 후스의 삶은 참으로 바울의 삶을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후스는 감옥에서 지내는 시간조차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는 자기 생의 모든 시간을 주님께만 드리기 위해 힘쓰며 살았습니다. 그에 비해 저는 감옥도 아닌 참으로 자유로운 상태에서 살아가면서도, 책을 쓰기는커녕 그저 멍하니 먼 산만 쳐다볼 때가 많았었는데 말입니다. 후스의 부지런한 삶은 참으로 저의 게으른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렇게 후스의 벽화를 뒤로하고 호텔 밖으로 나온 저는, 후스에게 화형이 선고된 스테판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이곳에서 후스는 그의 신앙에 대한 마지막 심문을 받았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후스가 끝까지 자신의 개혁 신앙을 버리지 않자, 그의 사제직을 박탈하고 그의 책들을 공개적으로 불태우면서 그에게 파면을 선고했습니다. 또한, 그를 화형에 처하기로 최종 판결을 내렸습니다.
참으로 평온하게만 보이는 이 성당에서 아무 죄 없는 후스가 이단으로 정죄를 받아, 화형이 확정되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존 폭스의 『기독교 순교사화』에는 얀 후스가 화형 판결을 받은 뒤에 했던 말이 나옵니다. 그 책에 나오는 그의 고백은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하셨던 그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오 나의 하나님! 당신의 무한한 자비로 내 원수들의 이 부정을 용서해주옵소서. 당신은 나를 고소하는 자들의 부정을 아십니다. 나는 얼마나 왜곡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되어 있는지요. 나는 가치 없는 증거와 잘못된 정죄로 얼마나 압박을 당해 왔는지요. 그렇지만 오 나의 하나님이시여!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당신의 그 자비로 내게 가해진 잘못을 갚지 말아 주옵소서.」
그렇게 자기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원수를 긍휼히 여겼던 후스가 순교한 장소는, 스테판 성당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곳으로 가는 시간 내내, 저는 줄곧 그가 화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걸었습니다. 후스가 화형장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주변에서는 이단 사상(개혁 신앙)을 철회하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후스는 그 소리에 대해 단호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만일 제가 일으킨 사상이 인간의 생각과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면 저는 얼마든지 제 견해를 취소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저의 신앙을 결코 철회할 수 없습니다.」
한 15분 정도 걸었을까요? 작은 길옆에 후스가 이 자리에서 순교했음을 알려주는 큰 돌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화단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기독교 순교사화』는 후스가 화형을 당하던 순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형 집행 장소에 이르자 그는 무릎을 꿇고 시편 몇 구절을 노래하더니 계속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 주님, 당신의 손에 저를 의탁하나이다! 내 영혼을 의탁하나이다. 당신은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오 가장 선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시여.”
장작 단에 불이 붙자마자 순교자는 아주 힘찬 목소리로 찬송을 불러서 그 찬송 소리는 장작이 타는 바삭거리는 소리와 군중들의 소음을 초월하여 들렸다. 드디어 그의 목소리는 불길로 말미암아 끊어졌고 그는 곧 종말을 고했다.」
저는 그 장소의 사진을 몇 장 찍은 뒤에, 얼마 동안 넋을 놓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잠시 후에 정신을 차린 저는 옆에 있는 기다란 의자에 몸을 의탁한 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들었습니다.
‘과연 후스는 무엇을 위해 순교했는가? 만약 내가 후스였다면, 나도 그가 목숨을 걸었던 것을 위해 기꺼이 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을까?’
▲ ’후스의 돌’ 중앙에 새겨진 글귀 – ‘Hieronymus von Prag’ 해석하면 ‘프라하 출신의 제롬’ 이라는 뜻입니다.1
한참을 그렇게 자리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신앙의 선배가 어떻게 신앙을 지켰고 순교했는지를 기억하고 보존하려는 이러한 후손들의 노력이 참 귀하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같은 부족한 신자도 이런 것들을 찾아보면서 그들의 믿음과 희생과 용기를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후손들의 노력이 점점 약해지고, 저처럼 그것을 찾아오는 사람의 수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아쉽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후스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요 12:24), 후스가 뿌린 씨앗은 약 100년 뒤에 루터와 칼빈을 통해 크게 결실하였습니다. 만약 후스가 그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의 씨앗을 뿌리지 않았다면, 저 위대한 종교개혁이 일어나기까지 과연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흘러가야 했을까요? 또 그러는 동안 얼마나 더 많은 이가 영적인 흑암 속에서 죽어가야만 했을까요? 물론,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계획과 전능하신 능력이 아니었다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귀하심과 위대하심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3편에 걸쳐서 얀 후스가 남긴 믿음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마침 올해는 후스가 순교한 지 꼭 600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기도 합니다. 심각하게 부패한 로마 카톨릭과 맞선 후스는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믿음의 사람이자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실수도 있었으며 부족하고 연약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프라하에서 설교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피신 중이던 후스가 저술한 『사도신경 해설』의 제5장(요한복음 8:32)에 나오는 내용 일부를 전해드리면서 얀 후스에 대한 탐방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여, 진리를 구하십시오. 진리를 들으십시오. 진리를 배우십시오. 진리를 사랑하십시오. 진리를 말하십시오. 진리를 굳게 지키십시오. 죽기까지 진리를 방어하십시오. 진리가 그대를 죄로부터, 마귀로부터, 영혼의 죽음으로부터, 마지막에는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각주
1. 후스에 대한 두 번째 탐방기에서 언급된 적이 있는 제롬은 후스에게 위클리프의 개혁 사상을 알려준 참 고마운 친구입니다. ‘후스의 돌’에 그의 이름이 새겨진 이유는, 후스가 순교한 지 1년 뒤에 그도 역시 후스와 똑같은 이유로 이곳에서 화형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곳을 찾았을 때 저는 후스의 순교를 생각하느라, 다른 것에 비교적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았던 반대 면에 무언가가 새겨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탐방기를 쓰면서, 반대 면에 위 그림과 똑같은 형태로 후스의 이름과 순교 날짜가 적혀있고, 제가 보고 사진을 찍은 면에는 제롬의 이름과 순교 날짜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참고한 도서들
1. 박양규, 『유럽비전트립1』, 두란노, 2011
2. 오병학 글, 주영광 그림, 『세계위인시리즈 동화만화2: 존 위클리프, 존 후스, 잔 다르크』, 은혜출판사, 1997
3. 이은선, 『종교개혁자들 이야기』, 도서출판 지민, 2013
4. 라은성, 『이것이 교회사다: 묻어둔 진리』, 페텔, 2013
5. 이지 오떼르, 『걸어서 가보는 프라하 종교개혁 이야기』, 김진아 옮김, 한국장로교출판사, 2012
6. 조병수, 『종교개혁 497주년 기념 강좌3 종교개혁의 선구자 보헤미아의 후스』, 신반포중앙교회, 2014
7. 존 폭스, 『기독교 순교사화』, 양은순 역, 생명의말씀사, 2012
8. 토마시 부타, 『체코 종교개혁자 얀 후스를 만나다』, 이종실 옮김, 도서출판 동연,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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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2-1) – 전 (PRE)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발자취를 따라서(후시네츠)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2-3) – 전 (PRE) 종교개혁자 얀 후스의 발자취를 따라서(콘스탄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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