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역정의 크리스천과 함께 천성을 향해 나아가자
(6) 속이는 혀
김재호
▲ 크리스천에게 엉뚱한 길을 가르쳐준 세속 현자(Wordly Wiseman)
「크리스천: “그는 내게 어서 빨리 짐을 벗어 던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도 역시 짐을 벗어 던지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장소에 도착하기 위해서 자세한 지시를 얻을 수 있도록 저쪽 문을 향하여 가는 중이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그는 당신이 내게 가르쳐준 길처럼 많은 어려움과 위험이 따르지 않는 훨씬 편하고 빠른 지름길을 가르쳐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길로 가면 판단력이 뛰어나고 이러한 짐들을 쉽게 벗겨줄 수 있는 기술을 지닌 고귀한 신사의 집에 이르게 된다고 했지요. 그리하여 어서 빨리 이 짐을 벗어버리고 싶은 생각에 그만 귀가 솔깃해져서 가던 길을 버리고 이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여기까지 와보니 아까 말씀드린 대로 언덕이 너무 위험하여 혹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서 지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는 중입니다.”」1
한 영혼에게 참된 도움을 주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고 애를 쓰는 이가 있는 반면, 어떻게든 그가 그리스도께 이르지 못하게 방해하려고 애를 쓰는 이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 이들은 죄로 인해 상심하여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살며시 다가가서, 십자가가 아닌 다른 방편으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속삭인다.
이들이 말하는 그 ‘다른’ 방법이란 결국, 예수님께서 가지 말라고 경고하셨던 바로 그 ‘넓은 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멋모르고 좁은 길에서 이탈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왜냐하면 저들의 말에는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 진의를 파악해내기가 꽤 어렵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을 아무런 생각 없이 무턱대고 듣다 보면, 어느새 그들이 죄 문제를 쉽고 효율적으로 해결해주는 지혜롭고 고마운 사람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고자 하는 이들은 매사에 베뢰아 사람들과 같이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 모든 신앙의 권면을 참된 진지함과 간절함으로 듣되,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성경과 꼼꼼하게 대조하면서 맞추어 보아야 한다(행 17:11). 사도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도 그리하는 일이 권장되었다면, 하물며 우리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이겠는가?
따라서 그와 같이 꼼꼼하고 진지하게 주님을 찾는 이들은 속이는 혀에서 흘러나오는 궤변의 피해를 훨씬 덜 겪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들은 그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아야만 할 것이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천성에 이르기 전에 마귀에게 사로잡혀 평생 노략질당하는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고전 10:5).
성경은 이러한 속이는 자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라. 너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으니, 너희는 믿음으로 굳게 서서 마귀를 대적하여라. 너희가 아는 대로 너희의 형제들도 세상에서 동일한 고난을 겪고 있다.” (벧전 5:8~9, 바른 성경)
“그러나 놀랄 것이 없으니,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假裝)한다. 사탄의 일꾼들이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그들의 행위대로 될 것이다.” (고후 11:14~15, 바른 성경)
“’너희에게 화가 있다. 위선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그 속은 착취와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맹인 된 바리새인들아, 먼저 잔 속을 깨끗하게 하여라. 그러면 그 겉도 깨끗하게 될 것이다.” (마 23:25~26, 바른 성경)
참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마귀를 따라 사람을 속여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하는 이들 중에는 사람을 돕고자 하는 선한 의도와 열심으로 가득한 경우가 많다. 그들은 ‘정말로’ 사람들을 건져내고 도와주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한 고통과 어려움이 생겨난 근본 원인과 현재 상태를 크게 오판한다는 점에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다(마 23:13~15). 그리고 마귀는 그 점을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그들은 회심의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대항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극악무도한’ 지를 성령님께서 깨우쳐주셔서 그렇게 괴로워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썩어들어간 피부를 절개하고서, 그 아래 숨어 있는 ‘죄’라는 무서운 암 덩이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은혜로써 깨끗하게 도려내는 수고를 굳이 감당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과정 가운데, 어쩔 수 없이 피가 튀고 일시적으로 고통이 더해지는 일을 심히 꺼리고 두려워한다. 그들 자신이 수술대에 올라본 일이 없으니,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그저 무지막지하다고만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죄라는 암 덩이에 ’빨간 약’을 보기 좋게 발라주고, 썩어서 시커멓게 된 피부 위에는 귀엽고 친근한 무늬가 그려진 반창고도 예쁘게 붙여준다. 그러고 나서 ‘할머니 손은 약손’이라고 반복하며 환부를 부드럽게 보듬어주기만 한다. 당장 보기에는 그런 일이 효과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가져올 궁극적인 결과가 무엇인가? 인간적이고도 감상적인 위로와 경험에 취하여, 그리스도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바리새인이 고상해 보이는 자기 의에 취하여서, 은혜를 선포하는 예수님을 거절하고 미워하여 십자가에 달아 죽였던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죄 문제를 인간적인 지혜에 근거하여 해결하려고 시도하면, 겉으로 볼 때는 보기 흉한 모습도 가려지고 일시적으로 부기도 빠져서 다 나은 듯이 보이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피부 아래에서는 암세포가 뼈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가장 완고하게 대적하게 했던 ‘자기 의’라는 그 무서운 죄가 뼛속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간다.
한 번의 수술로 깨끗하게 해결될 일이,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몇 차례의 대수술과 엄청난 부작용을 수반하는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통해 겨우 목숨만 건지는 엄청난 일로 바뀐다. 그중 일부는 끝내 주님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 버린 가룟 유다처럼 영원히 생명을 잃어버리는 일도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교훈을 객관적으로 정리해 놓은 개혁주의 교리체계, 즉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같은 역사적인 신조에 자신을 비추어 점검해야 한다. 또한 그런 일을 ‘번거롭고 과하며 현시대와는 맞지 않는 일’로 여기는 이 시대의 풍조를 아주 심각하게 여겨야 한다. 속이는 혀를 가진 자들이 가장 환영하는 사람이 바로 그런 풍조를 따라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자들 가운데는, 분명히 부드러운 말로 영혼들을 꾀어 영원한 멸망으로 이끄는 이들이 크게 활약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참된 신자라고 해도 정말 ‘멋모르고’ 속아 넘어가서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잠시 정신이 나가 십자가를 만류하려고 했을 때 어떻게 대응하셨던가?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가리켜 ‘사탄’이라고 하셨다.
이처럼 참 신자가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경우를 대함도, 진짜 속이는 혀를 가진 독사의 새끼를 대함도 근본적인 대응은 같다. 그것은 바로 ‘책망’이다. 그리고 그 책망에 담긴 의미는 다음과 같다.
‘정신 차려라! 어서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 지금 네 발은 그 위험한 길에 이미 한 발을 딛고 서 있다. 그러니 어서 돌이켜라. 살아라. 어찌하여 죽으려고 하느냐?’
이처럼 이러한 책망에는 참된 긍휼과 공의가 어우러져 있다. 참된 책망이 사람을 망하게 하지 않고 도리어 구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이와 같은 책망으로 대응해야 할 자들은 과연 누가 있을까?
가장 눈에 두드러지는 이들은 로마 천주교 신자들이다. 그들은 구원의 근거에 자기 공로와 선행을 더 했다. 이들의 믿음은 그리스도 십자가 사역의 유일성과 충족성을 참 교묘하고도 효과적으로 부정한다. 그래서 많은 이가 그 교묘하고도 효과적인 속임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영혼에 큰 해를 입고 있다. 우리는 이런 늪에 빠진 이들을 참된 긍휼과 공의로써 호되게 책망해야 한다.
두 번째로, 성경 위에 혹은 성경과 자기 체험을 동일 선상에 두는 신비주의를 따르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성경 위에 또는 성경과 철학적 지혜를 동일 선상에 두는 자유주의를 따르는 이들도 이에 해당한다. 이들의 가르침을 따라가면, 전자는 결국 이상한 영을 좇게 되고 후자는 결국 세상과 사람을 따르게 된다. 둘 다 그리스도를 좇게 하는 듯 자신을 교묘하게 포장하고 있지만, 결국은 그 길을 봉쇄하고 만다. 이들의 입에는 실로 무서운 독, 속이는 뱀의 독으로 가득하다.
세 번째로, 성화(聖化)의 자리에 ‘성격 차이에 따른 다름과 내적 치유’ 등등의 대용물을 가져다 놓는 심리학 목회를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가르치는 대로 따라가면 교회는 연합하여 하나 되기는커녕, 세속 심리학자들이 분류해 놓은 유형별로 쪼개져 각자가 따로 놀게 된다.
이들의 가르침을 믿고 따라가면, 자신이 타고난 기질의 단점을 계속 보완하면서 나와는 다른 기질을 소유한 이의 유익을 위해 스스로 절제하고 균형을 맞추려는 성화의 노력은 아주 부당하고 어리석은 ‘구시대적인 발상’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봐라, 너는 이러한 유형의 사람이고 나는 이러한 유형의 사람이니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서 쓸데없이 간섭하거나 참견하지 말자.”라는 말이 힘을 얻게 된다. 그러나 잠깐의 위로나 편함을 위해, 성화를 포기하는 자가 최종적으로 이르게 될 곳이 과연 어디라고 생각하는가?
이 외에도 이 세상에는 속이는 혀를 날름거리며 삼킬 자를 찾는 이들이 아주 많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은 그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크고 교묘하여서, 시급하게 멀리해야 할 것들만 간략하게 추려낸 것에 불과하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속이는 혀에 속은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또 내가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을 들었는데, 그 음성이 말하였다. ‘나의 백성아, 너희는 거기에서 나오너라. 이는 너희가 그 여자의 죄악들에 가담하지 않고 그 여자가 받을 재앙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계 18:4, 바른 성경)
그리고 속이는 혀를 가진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신다.
“예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들이 없을 수는 없으나,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 이 작은 자들 가운데 하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기 목에 연자방아 맷돌을 매달고 바다 속에 빠지는 것이 그에게 나을 것이다.’” (눅 17:1, 2, 바른 성경)
우리는 천성에 이르기까지 늘 주의해야 한다. 매사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주님께서 항상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보호해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그리하면서 오직 좁은 길, 기록된 말씀만을 우리의 유일한 권위로써 늘 믿고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이를 끝까지 보호해주실 것이다. 사자 굴에 던져졌던 다니엘을 보호해주셨던 것처럼 말이다.
각주
1 존 번연,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 유성덕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포켓판, p.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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