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역정의 크리스천과 함께 천성을 향해 나아가자
(5) 도움의 손길
김재호
「수렁 속에 홀로 남은 크리스천은 그의 집 쪽에서는 멀고 좁은 문 쪽으로는 가까운 늪의 가장 자리로 기어오르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마침내 그는 늪의 가장자리에 이르렀으나 등에 짊어진 무거운 짐 때문에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이때 나는 꿈속에서 도움(Help)이라는 이름을 지닌 한 남자가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무얼 하고 있느냐고 묻는 것을 보았다.」1
죄 문제를 해결하려고 좁은 길로 나아가며 애쓰는 사람이라고 해서 고난이 피해가지는 않는다. 돌밭에 뿌려진 씨앗과 같은 이를 완전히 낙심하게 한 어려움이 똑같이 찾아온다. 그래서 그들도 어려움 앞에서 절망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절망은 세상으로 돌아간 이들을 넘어뜨렸던 절망과는 전혀 다르다. 전자는 이제 죄가 자신을 틀림없이 멸망하게 할 것이라는 인식에서 말미암는 영적인 절망이다. 반면, 후자는 자신이 꿈꾸었던 안락함의 환상이 무너지면서 나타나는 육신적인 절망이다.
영적인 절망에 빠진 사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러한 절망으로 인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살기 위한 영적인 몸부림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지’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반면, 육신적인 절망은 정확하게 그 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이러다가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어떻게든지’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이처럼 겉보기에는 별다를 것이 없어 보여도, 실제로 이들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절망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자의 사람에게 “그래, 넌 끝났어! 그러니 그 부질없는 짓을 그만둬. 그리고 이제 그만 편하게 살아. 더 해봐야 너만 힘들 뿐이야.”라고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이들은 더 깊은 절망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물론 그러는 중에도 그들의 발은 계속 꼼지락거리면서 어떻게든 세상 반대쪽으로 나아가려고 죽을 힘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하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올 정도로 앞길이 캄캄함을 느끼면서도, 감히 세상으로 돌아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심령은 이미 죽음 그 자체보다도, 죽음의 뿌리가 되는 죄의 비참함을 영적으로 자각하면서 괴로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고민은 육신적으로 죽고 사는 문제에 매여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살고 죽는 문제에 매여있다. 이런 상태에 놓여 있는 이들에게는, 호된 질책과 책망을 하기보다 가급적 따뜻한 위로와 더불어 올바른 길을 다시 가르쳐주는 게 좋다. 그들에게는 그런 일이 더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태에 있는 이들을 이렇게 위로하시고 권면하신다.
“그는 정의로 승리할 때까지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실 것이다.” (마 12:20, 바른 성경)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고, 또 내게로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밖으로 내쫓지 않을 것이다.” (요 6:37, 바른 성경)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예루살렘 성읍을 돌아다니며 그 가운데에서 행해지는 모든 역겨운 일들로 인하여 탄식하고 신음하는 자들의 이마에 표시를 하여라.’ 하시고” (겔 9:4, 바른 성경)
그들은 주변에서 건네는 이러한 참된 위로의 말씀을 따라 가까스로 소생한다. ‘이제 나는 끝났구나.’하는 절망의 수렁에서 겨우 빠져 나와 좁은 문으로 향하는 길에 다시 올라서게 된다. 그들은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의 미숙함과 어리석음, 그리고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미약하게나마 발견하고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그들은 아주 약하게 타고 있는 촛불처럼 그을음과 연기를 심하게 내뿜으면서도 미약한 빛과 열도 함께 내고 있다.
그러므로 먼저 성도 된 우리에게는 이러한 연약한 그릇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한 쉼을 누릴 수 있도록 세심하게 도와줄 의무가 있다. 부디 이런 자들을 마구 다그치거나 함부로 몰아세우지 않도록 주의하자. 이런 상태에 있는 이들은 그 모든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더욱 심하게 괴로워하기 때문이다. 불쌍한 한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도움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괴로움에 괴로움을 더하여 받는 일이 일어나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주의를 기울이고 조심한다고 해도, 그런 불상사를 완전히 피하기는 어렵다. 먼저 성도가 되어 돕는 위치에 있는 사람 역시도 똑같이 연약함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참 역설적이게도, 교회의 거룩함과 순결함에 대한 열심이 큰 사람일수록 이런 가여운 이들까지 완악한 자들을 대하는 것처럼 하는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서로를 비난하는 길로 들어서면 안 된다. 오히려 참된 긍휼로써 양쪽 모두에게 분명한 사실을 들려주어야 한다.
성경에는 이렇게 치우친 길로 걷고 있는 이들을 위한 도움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아들이고, 그의 의심하는 것을 비판하지 마라. 어떤 이는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으나,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는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마라.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롬 14:1~3, 바른 성경)
“그 집주인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하므로 종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그것들을 뽑아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나 그 집주인이 말하였다. ‘아니다. 너희가 그 가라지들을 뽑다가 그것들과 함께 밀도 뽑아 버리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놓아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여, 먼저 가라지들을 뽑아서 그것들을 태우도록 단으로 묶고, 밀을 내 곳간에 모아 들이라고 하겠다.’” (마 13:28~30, 바른 성경)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할 것이 있으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하여라.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너에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 그러나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들을 미워하는구나. 나도 그것을 미워한다.” (계 2:4~6, 바른 성경)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 죄의 참상을 맛보게 하시는 이유는 그를 고쳐주시기 위함이다. 절대로 그를 죽이시려고 그리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가장 손쉽고도 완벽하게 멸망에 이르게 하시는 방법은 ‘무관심’과 ‘침묵’이다(히 12:8).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건지기 위한 선한 의도를 가지고 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그에 따르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감 없이 제시해야 한다. 즉, 자기 자녀에게 매를 드는 아비의 심정과 상대를 향한 간절함 가운데 ‘경고의 형식’으로 권면해야 한다.
이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 마음이 어느새 상대를 향한 격렬한 미움과 살의로 얼룩져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런 마음은 절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약 1:20). 그러므로 그런 어리석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때마다 우리 주님을 기억하도록 하자. 우리 주님께서는 백성을 엉뚱한 길로 이끄는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씀을 가감 없이 던지셨다(마 12:34). 그러나 주님께서는 또한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셨다(눅 23:34).
예수님의 그 거룩한 분노가 과연 어디에서 말미암았겠는가? 바로 멸망해가는 세상을 향한 참된 긍휼이었다. 많은 이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야 할 자들이 도리어 영혼을 도살장으로 끌고 가는 악독함과 어리석음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리도 크게 분노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분노를 통해 저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깨닫고 회개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셨다.
이처럼, 주님의 분노는 사람이 자기 분을 참지 못하고 화를 폭발시키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참된 사랑의 분노다. 주님의 마음이 그러했기에,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바리새인의 완악함이 지극히 악독하여서 참으로 멸망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동시에 꺼져가는 심지 같은 가여운 영혼들이 참된 위로 가운데 소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판단할 것이 많아도 스스로 판단하지 않으신다. 다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있는 그대로 세상에 전하실 뿐이다(요 8:26~28). 그분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지 심판하러 오신 분이 아니다(요 3:17). 그럼에도 불구하고 멸망으로 나아가는 자는 자기의 완악함 때문이지 우리 주님의 분노에 걸려 넘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자들이다(요 3:19).
죄로 인한 절망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도 도저히 세상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이들이여. 그런 이를 진정 가엾게 여기시는 그리스도를 어서 바라보라!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같은 이가 멸망에 이르는 일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러니 당신의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라. 그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고 저는 다리로 어긋나지 않게 하며 고침을 받게 하여라(히 12:12, 13). 주님께서는 당신을 지금 그리로 부르고 계신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그리하면 당신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당신의 도움은 절대로 먼 데 있지 않다.
각주
1 존 번연,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 유성덕 옮김,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포켓판, pp. 42,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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