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의 깊이를 조금 더합니다.

Jonathan Edwards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6) ‘대각성’의 싹이 트다 -하-

김재호

1. 국제적인 신앙의 협력과 긴장 에드워즈는 이미 1731년 보스턴 설교를 통해, 칼빈주의 교리 수호와 참된 회심을 공통 분모로 하는 복음주의 부흥 운동의 주요 인물 중 하나로 등장한 상태였다. 에드워즈의 외할아버지였던 솔로몬 스토다드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이 건전한 화합은, 부흥의 불길이 한 지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다른 지역에까지 활발하게 퍼져나가게 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불꽃이 이미 타오르던 지역에서는 불꽃이 더욱 활활 타오르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또한, 이 화합은 단순히 미국 지역에서만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 본국이었던 영국에서도 같은 뜻을 품고 있었던 칼빈주의자들이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Jonathan Edwards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6) ‘대각성’의 싹이 트다 -상-

김재호

1. 회심, 대각성의 불길이 타오르게 한 불씨 솔로몬 스토다드가 뿌려놓은 위대한 신앙 유산과 더불어 그의 목회 기간 말년에 찾아온 노샘프턴의 방종은, 대각성의 불길이 타오르는 데 필요한 재료를 적절하게 제공해주었다. 에드워즈는 스토다드가 늘 그랬던 것처럼 방종하는 회중을 꾸짖고 책망하기에 힘썼고, 그중에서도 조금 더 혈기왕성한 젊은 사람들의 죄악을 개선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약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가자 노샘프턴의 젊은이들은 점점 젊음의 유흥을 즐기는 자리를 열지 않고, 그 대신 공예배에 참석하는 횟수를 늘려가기 시작했다.

The_Pilgrim's_Progress

천로역정의 크리스천과 함께 천성을 향해 나아가자 (6) 속이는 혀

김재호

한 영혼에게 참된 도움을 주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고 애를 쓰는 이가 있는 반면, 어떻게든 그가 그리스도께 이르지 못하게 방해하려고 애를 쓰는 이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 이들은 죄로 인해 상심하여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살며시 다가가서, 십자가가 아닌 다른 방편으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속삭인다. 이들이 말하는 그 ‘다른’ 방법이란 결국, 예수님께서 가지 말라고 경고하셨던 바로 그 ‘넓은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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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지 않은 단단한 음식도 씹어 삼켜보자 (5)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

김재호

안타깝게도, 현대 기독교인에게 ‘진노하시는 하나님’ 이야기는 이제 생소하다 못해 율법주의에 빠진 이들이나 믿는 잘못된 가르침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인지 현대 기독교인이 믿는 하나님은 참으로 친절하고 여유가 넘치며, 재치와 관용으로 사람을 한없이 품어주는 따뜻한 분이다. 그들의 하나님은 진노를 모르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이에 반해 성경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고 너무도 명백하게 선언한다. 현대 기독교인에게 도무지 양립할 수 없는 개념처럼 다가오는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이 충분히 양립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만큼 현대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음을 뜻한다.

Jonathan Edwards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5) 영적 전장(戰場)의 최전선에 서다

김재호

1. 노샘프턴의 방종 노샘프턴은 솔로몬 스토다드라는 위대한 목회자가 오랫동안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지역이었음에도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새롭게 정착할 만한 땅이 점점 줄어들면서 땅을 많이 소유한 대지주와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에 일어나는 신경전과 파벌 싸움이 잦아졌다. 그로 인해 서로를 향한 원한이 점점 깊어져 갔고 그러다 결국 한 번 큰 사고가 터지고야 말았다. 서로 분쟁하는 가운데 한쪽이 다른 한쪽 대표에게 일방적인 모욕과 구타를 퍼붓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었다

The_Pilgrim's_Progress

천로역정의 크리스천과 함께 천성을 향해 나아가자 (5) 도움의 손길

김재호

죄 문제를 해결하려고 좁은 길로 나아가며 애쓰는 사람이라고 해서 고난이 피해가지는 않는다. 돌밭에 뿌려진 씨앗과 같은 이를 완전히 낙심하게 한 어려움이 똑같이 찾아온다. 그래서 그들도 어려움 앞에서 절망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절망은 세상으로 돌아간 이들을 넘어뜨렸던 절망과는 전혀 다르다. 전자는 이제 죄가 자신을 틀림없이 멸망하게 할 것이라는 인식에서 말미암는 영적인 절망이다. 반면, 후자는 자신이 꿈꾸었던 안락함의 환상이 무너지면서 나타나는 육신적인 절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