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의 깊이를 조금 더합니다.

Jonathan Edwards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14-2) 스톡브리지와 에드워즈: 저술가 에드워즈

김재호

에드워즈는 쫓겨가듯 한적한 변방으로 갔지만, 오히려 그 일은 국제적인 지적 전쟁터 한복판에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스톡브리지는 그에게 현실적인 어려움을 많이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시간 여유도 많이 가져다주었다. 그 험하고 먼 지역까지 그를 만나려고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강단이 비었을 때 이웃 지역에서 설교해달라고 요청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렇게 많은 양 무리를 돌보는 짐을 벗고 나자, 에드워즈는 학창시절부터 줄곧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왔던 일을 비로소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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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로역정의 크리스천과 함께 천성을 향해 나아가자 (15) 구원의 기쁨

김재호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교회 안에서 ‘진실한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기쁨을 누리는 이들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는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이들은 여전히 많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구원의 기쁨’이란, 옛 성도들이 말하던 ‘그 구원의 기쁨’과는 거리가 멀다. ‘경배와 찬양’으로 대표되는 문화주의와 감정주의가 그 말의 실질적인 의미를 전혀 다른 의미로 바꾸어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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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걸러내기」 신앙과 인공지능

김재호
예로부터 지성은 사람에게만 있는 존귀한 특징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현대 정보기술의 발전은 그 생각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 사람보다 똑똑한 기계,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기계,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 사람이 아예 기계로 변하는 세상 등을 그린 책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알파고가 일류 바둑 기사인 이세돌을 꺾은 뒤부터 더 많이 나오는 듯하다. 그러나 신학적인 토대 위에서 인공지능의 허와 실을 차근차근 따져보면, 그런 전망이 얼마나 성급하고 무모한지를 쉽게 알 수 있다.

Jonathan Edwards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14-1) 스톡브리지에서: 인디언 선교사 에드워즈

김재호

1750년 7월 1일, 에드워즈는 『심판 날 다시 만날, 분쟁하는 목사와 교인들 (A Farewell Sermon)』이라는 고별 설교를 통해 23년간의 노샘프턴 사역을 마무리했다. 노샘프턴 주민들은 에드워즈가 사임했으니,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거의 무조건적인 반감으로 에드워즈를 내쫓는 데만 열을 올리다보니, 정작 누구를 후임으로 초청할지를 놓고 진지하게 논의하고 대책을 내놓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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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로역정의 크리스천과 함께 천성을 향해 나아가자 (14)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의 신앙

김재호

우리 시대만큼 예수님의 재림을 올바르게 생각하고 사모하지 못하는 시대가 또 있을까? 예수님의 재림을 바라보는 현대 교인의 생각과 행동을 유심히 살펴보면, 양 극단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한 부류는 예수님의 재림을 까마득한 미래에 있을 ‘어떤’ 사건처럼 받아들이거나, 실제 일어날 사건이 아닌 상징으로 받아들인다. 다른 부류는 신앙의 본질을 망각한 채, 온갖 사건들 속에서 뭔가 놀랍고 극적인 일이 임박했다는 징후를 발굴해내는 데 골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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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걸러내기」 음모와 음모론

김재호

타락한 사람의 마음은 성급하게 어느 한 극단으로 치우치기 좋아하고, 마귀는 그런 사람의 심리를 악용하기를 즐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음모가 계획되고 실행되는지 말하는 것 자체를 악하고 위험한 일처럼 여기고, 다른 이들은 마치 세상만사가 음모로 통제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전자는 우리 실생활에 음모의 영향이 실제로 작용하는데도 마냥 태연하고, 후자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을 엄청나게 부풀려서 정상적인 사고와 판단을 흐려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