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athan Edwards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16) 에드워즈의 삶과 신앙

김재호

에드워즈 생전에 일어난 ‘프렌치-인디언 전쟁’은 1760년에 이르러 전세가 영국 쪽으로 확연하게 기울었다. 그러다 1763년에 파리에서 강화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결국 영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뉴프랑스(캐나다) 지역을 할양받았으며, 스페인과는 쿠바 지역과 플로리다를 맞바꾸었다. 그렇게 북미 대륙의 영토가 급격하게 넓어지자, 영국은 방대해진 지역을 방어하고 그동안 전쟁에 쏟아부었던 돈을 충당할 목적으로 연달아 세금을 신설하고 북미 식민지에 부과하기 시작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10) 반(反)부흥주의, 대각성과 맞섰던 보수 신앙 운동

김재호

대각성 확산의 최대 걸림돌은 성급한 감정주의라는 모조품이었다. 에드워즈는 처음에 그것을 참된 각성에 뒤따르는 작은 부스럼 정도로만 여겼었다. 그러나 그 부작용이 대각성 운동의 근본 속성을 잠식해가는 모습을 분명하게 본 뒤에는 가장 위험하고 치명적인 해악으로 재평가했다. 에드워즈가 처음에 성급한 감정주의를 비교적 온건하게 대한 데에는, 사람의 연약함에 대한 그의 많은 경험이 주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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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9) 부흥의 불길 지킴이 에드워즈

김재호

1740년에 휫필드와 테넌트가 일으킨 거대한 각성의 불길은 활활 타올라 삽시간에 뉴잉글랜드 전역을 집어삼켰다. 그동안 죄로 죽었거나 잠들어 있던 영혼들이 깨어나 앞을 다투어 천국으로 몰려들었고, 신실한 목회자들은 그 허기진 영혼을 진리로 먹이고 입히느라 눈코 뜰새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6년 전 힘차게 타올랐던 부흥의 불길이 인간적인 허약함과 그 틈을 파고든 마귀의 궤계로 인해 힘없이 주저앉는 일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Jonathan Edwards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8) 그리스도밖에 모르던 위대한 어린아이, 조지 휫필드 <하>

김재호

휫필드는 회심한 뒤 고향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새 생명을 추구하는 동안 건강이 너무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일기와 『일지(Journals)』에서 이 시기에 해당하는 대목을 살펴보면, 과연 건강을 회복하려고 고향에 내려간 사람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바쁘게 움직였다. 휫필드의 귀향(歸鄕) 생활은 홀리 클럽 친구들과 함께 경건하게 생활하던 그때의 모습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시간 계획을 촘촘히 짠 뒤 그대로 실행했고, 저녁마다 일기를 쓰면서 자기를 돌아보고 허물이 발견되면 자기를 꾸짖으면서 그 허물에서 돌이켰다.

Jonathan Edwards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6) ‘대각성’의 싹이 트다 -하-

김재호

1. 국제적인 신앙의 협력과 긴장 에드워즈는 이미 1731년 보스턴 설교를 통해, 칼빈주의 교리 수호와 참된 회심을 공통 분모로 하는 복음주의 부흥 운동의 주요 인물 중 하나로 등장한 상태였다. 에드워즈의 외할아버지였던 솔로몬 스토다드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이 건전한 화합은, 부흥의 불길이 한 지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다른 지역에까지 활발하게 퍼져나가게 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불꽃이 이미 타오르던 지역에서는 불꽃이 더욱 활활 타오르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또한, 이 화합은 단순히 미국 지역에서만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 본국이었던 영국에서도 같은 뜻을 품고 있었던 칼빈주의자들이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Jonathan Edwards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6) ‘대각성’의 싹이 트다 -상-

김재호

1. 회심, 대각성의 불길이 타오르게 한 불씨 솔로몬 스토다드가 뿌려놓은 위대한 신앙 유산과 더불어 그의 목회 기간 말년에 찾아온 노샘프턴의 방종은, 대각성의 불길이 타오르는 데 필요한 재료를 적절하게 제공해주었다. 에드워즈는 스토다드가 늘 그랬던 것처럼 방종하는 회중을 꾸짖고 책망하기에 힘썼고, 그중에서도 조금 더 혈기왕성한 젊은 사람들의 죄악을 개선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약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가자 노샘프턴의 젊은이들은 점점 젊음의 유흥을 즐기는 자리를 열지 않고, 그 대신 공예배에 참석하는 횟수를 늘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