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역사에 나타난 사건와 인물을 탐구하여 교훈을 얻습니다.
김재호
1. 국제적인 신앙의 협력과 긴장 에드워즈는 이미 1731년 보스턴 설교를 통해, 칼빈주의 교리 수호와 참된 회심을 공통 분모로 하는 복음주의 부흥 운동의 주요 인물 중 하나로 등장한 상태였다. 에드워즈의 외할아버지였던 솔로몬 스토다드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이 건전한 화합은, 부흥의 불길이 한 지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다른 지역에까지 활발하게 퍼져나가게 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불꽃이 이미 타오르던 지역에서는 불꽃이 더욱 활활 타오르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또한, 이 화합은 단순히 미국 지역에서만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 본국이었던 영국에서도 같은 뜻을 품고 있었던 칼빈주의자들이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김재호
1. 회심, 대각성의 불길이 타오르게 한 불씨 솔로몬 스토다드가 뿌려놓은 위대한 신앙 유산과 더불어 그의 목회 기간 말년에 찾아온 노샘프턴의 방종은, 대각성의 불길이 타오르는 데 필요한 재료를 적절하게 제공해주었다. 에드워즈는 스토다드가 늘 그랬던 것처럼 방종하는 회중을 꾸짖고 책망하기에 힘썼고, 그중에서도 조금 더 혈기왕성한 젊은 사람들의 죄악을 개선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약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가자 노샘프턴의 젊은이들은 점점 젊음의 유흥을 즐기는 자리를 열지 않고, 그 대신 공예배에 참석하는 횟수를 늘려가기 시작했다.
김재호
1. 노샘프턴의 방종 노샘프턴은 솔로몬 스토다드라는 위대한 목회자가 오랫동안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지역이었음에도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새롭게 정착할 만한 땅이 점점 줄어들면서 땅을 많이 소유한 대지주와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에 일어나는 신경전과 파벌 싸움이 잦아졌다. 그로 인해 서로를 향한 원한이 점점 깊어져 갔고 그러다 결국 한 번 큰 사고가 터지고야 말았다. 서로 분쟁하는 가운데 한쪽이 다른 한쪽 대표에게 일방적인 모욕과 구타를 퍼붓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었다
김재호
1. 솔로몬 스토다드의 선한 유산 조나단 에드워즈의 외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드는 노샘프턴을 중심으로 60여 년간 사역하면서, 종종 매사추세츠 서부 지역의 대변인 역할을 감당했을 정도로 광범위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었다. 스토다드는 83세였던 1726년 겨울에 외손자인 조나단 에드워즈를 상임 부목사로 청빙하였고, 그 뒤 2년 반 동안 강단 사역을 함께 감당하였다. 그리고 1729년 봄에 스토다드가 소천하자, 에드워즈는 그의 뒤를 이어 노샘프턴의 담임 목회자가 되었다.
김재호
1. 모교의 위기 조나단 에드워즈가 다닌 예일 대학의 전신은 코네티컷 대학이다. 1701년에 세워진 이 영세한 대학은 1718년에 엘리후 예일의 기부금으로 뉴헤이븐에 새로운 건물을 짓고, 예일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이때의 대학은 현대의 대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목적―경건한 목회자 양성―으로 설립되고 운영되었다. 그중에서도 예일 대학은, 보스턴의 하버드 대학이 정통 청교도 교리를 포기하고 인크리스 매더를 학장직에서 쫓아낸 일에 맞서 세운, 특별한 의미를 지닌 대학이었다. 그러나 1722년 가을, 이러한 예일 대학의 학장이 ‘국교도 전향(영국 성공회로 귀의하겠다는 뜻)’을 선언하여 모두를 경악하게 했다.
김재호
1. 아버지와 가정환경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는 말은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꼭 맞는 말이다. 아버지 티모시와 아들 조나단은 모든 면에서 일치한다. 단지 아들이 아버지보다 더 뛰어났을 뿐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설교를 모두 들어본 당시 사람들은 아버지가 아들에 비해 박식하고 생명력이 있다고 생각했고, 아들은 보다 깊이 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티모시 에드워즈는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자신의 감독권 아래 두고 일일이 돌보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