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5) 영적 전장(戰場)의 최전선에 서다

김재호

1. 노샘프턴의 방종 노샘프턴은 솔로몬 스토다드라는 위대한 목회자가 오랫동안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지역이었음에도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새롭게 정착할 만한 땅이 점점 줄어들면서 땅을 많이 소유한 대지주와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에 일어나는 신경전과 파벌 싸움이 잦아졌다. 그로 인해 서로를 향한 원한이 점점 깊어져 갔고 그러다 결국 한 번 큰 사고가 터지고야 말았다. 서로 분쟁하는 가운데 한쪽이 다른 한쪽 대표에게 일방적인 모욕과 구타를 퍼붓는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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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2) 소년 에드워즈

김재호

1. 아버지와 가정환경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는 말은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꼭 맞는 말이다. 아버지 티모시와 아들 조나단은 모든 면에서 일치한다. 단지 아들이 아버지보다 더 뛰어났을 뿐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설교를 모두 들어본 당시 사람들은 아버지가 아들에 비해 박식하고 생명력이 있다고 생각했고, 아들은 보다 깊이 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티모시 에드워즈는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자신의 감독권 아래 두고 일일이 돌보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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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16) 에드워즈의 삶과 신앙

김재호

에드워즈 생전에 일어난 ‘프렌치-인디언 전쟁’은 1760년에 이르러 전세가 영국 쪽으로 확연하게 기울었다. 그러다 1763년에 파리에서 강화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결국 영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뉴프랑스(캐나다) 지역을 할양받았으며, 스페인과는 쿠바 지역과 플로리다를 맞바꾸었다. 그렇게 북미 대륙의 영토가 급격하게 넓어지자, 영국은 방대해진 지역을 방어하고 그동안 전쟁에 쏟아부었던 돈을 충당할 목적으로 연달아 세금을 신설하고 북미 식민지에 부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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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15)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김재호

에드워즈는 스톡브리지로 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모르긴 해도 분명히 그곳에서 저술에 전념하다 생을 마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한적한 변방 지역에서 생을 마칠 것만 같았던 그를 프린스턴 대학교로 불러내셨다. 프린스턴 대학은 원래 뉴어크에서 뉴저지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었으며, 에드워즈의 사위인 아론 버가 학장을 맡고 있었다. 그러다 1756년 11월에 학교를 프린스턴으로 옮기면서 학교 이름도 프린스턴 대학으로 바꾸고 새롭게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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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14-2) 스톡브리지와 에드워즈: 저술가 에드워즈

김재호

에드워즈는 쫓겨가듯 한적한 변방으로 갔지만, 오히려 그 일은 국제적인 지적 전쟁터 한복판에 뛰어드는 계기가 되었다. 스톡브리지는 그에게 현실적인 어려움을 많이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글을 쓰는 데 필요한 시간 여유도 많이 가져다주었다. 그 험하고 먼 지역까지 그를 만나려고 찾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강단이 비었을 때 이웃 지역에서 설교해달라고 요청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렇게 많은 양 무리를 돌보는 짐을 벗고 나자, 에드워즈는 학창시절부터 줄곧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왔던 일을 비로소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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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14-1) 스톡브리지에서: 인디언 선교사 에드워즈

김재호

1750년 7월 1일, 에드워즈는 『심판 날 다시 만날, 분쟁하는 목사와 교인들 (A Farewell Sermon)』이라는 고별 설교를 통해 23년간의 노샘프턴 사역을 마무리했다. 노샘프턴 주민들은 에드워즈가 사임했으니,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거의 무조건적인 반감으로 에드워즈를 내쫓는 데만 열을 올리다보니, 정작 누구를 후임으로 초청할지를 놓고 진지하게 논의하고 대책을 내놓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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