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역정의 크리스천과 함께 천성을 향해 나아가자
(10) 욕망과 인내
김재호
「그때 나는 꿈 속에서 해석자가 크리스천의 손을 잡고 어떤 작은 방으로 인도해 가는 것을 보았다. 그곳에는 두 소년이 각기 의자 위에 앉아 있었는데 그중 나이가 많은 소년의 이름은 욕망이고 나이 어린 소년의 이름은 인내였다. 욕망은 매우 불만스런 표정으로 앉아 있었으나 인내는 매우 조용하고 침착한 표정이었다.
“욕망이 불만을 품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고 크리스천이 물었을 때 해석자는 “그 소년들의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선물들을 그들에게 갖다 줄 테니 내년 초까지만 기다리라고 했지요. 그런데 욕망은 지금 당장 달라고 하고 인내는 기꺼이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설명해주었다.」1
불신자와 그리스도인은 소속이 각기 다르다. 전자는 이 세상에 속했고, 후자는 하늘나라에 속했다. 그래서 불신자는 자기 유업을 이 세상으로 받고 싶어 하며, 그리스도인은 장차 임할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받고 싶어 한다. 그러한 마음의 소원은 각자의 삶에서 욕망과 인내라는 서로 다른 열매를 맺게 한다.
불신자는 이 세상에 속했기에,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무언가가 없으면 마음이 불안하고 공허해진다. 반대로 손에 뭔가 조금 잡힌다 싶으면 뒷목과 어깨에 힘이 점점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들의 마음에는 참 평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들의 마음은 보이는 무엇에 항상 요동하며,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평생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속했기에,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무언가 때문에 마음이 요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매사에 자족하는 법을 익혀나간다(빌 4:11, 12). 세상 사람이 솔로몬과 비길 만한 부귀영화로 자기를 꾸며서 마음을 채우려고 할 때, 그리스도인은 참된 심령의 온유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여서 참된 풍부함과 아름다움을 세상에 나타낸다(마 6:26~30). 성경은 이러한 일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조심하여 모든 탐심을 물리쳐라. 사람의 생명이 그가 가진 소유의 풍성함에 달려 있지 않다.” 하셨다. 또 예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의 밭이 풍성한 수확을 내었다. 그가 속으로 생각하며 말하기를 ‘내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며, 그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가 곳간들을 헐어버리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 내 모든 곡식과 물건들을 쌓아 놓아야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 말하기를 영혼아,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놓았으니, 너는 쉬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라고 하였다.” (눅 12:15~19, 바른 성경)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말하기를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건은 당신이 가지시오.” 하자,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말하였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시며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여호와께 내 손을 들어 맹세합니다. 당신의 말이 ‘내가 아브람을 부자로 만들었다.’고 할까 하여 당신에게 속한 것은 실오라기나 신발끈이라도 내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겠습니다. 나는 젊은이들이 먹을 것과 나와 함께 간 사람들의 몫만 받겠습니다.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는 자기들의 몫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창 14:21~24)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하게 여겨라. 그분께서 친히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고 결코 너를 버리지도 않겠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하게 말하는데, “주님은 나를 돕는 분이시니,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하겠느냐?” 하였다(히 13:5, 6).」
이 세상은 장차 불의 심판으로 멸망할 곳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 부귀영화를 손에 넣으려면, 그만큼 장차 있을 주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지 말고 살아야 한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충실하게 좇으면서, 다른 이도 그 길로 최대한 많이 꾀어내는 데 성공해야만 큰 부귀영화를 얻을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이 그토록 타락했기에 심판을 말씀하며 회개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 세상이 참 살 만한 좋은 곳인데도 그냥 막 때려 부숴버리고 싶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그러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마치 나방이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이 세상 한복판으로 맹렬하게 뛰어든다. 장차 있을 영원한 심판의 두려움과 고통보다는 눈앞의 재물을 손에 넣지 못하고 육신의 소욕을 발산하지 못하는 당장의 고통을 더 크게 여기며 두려워한다.
심지어는 세속의 늪에 깊이 빠진 자기 자신을 참으로 지혜롭고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그런 이들은 세속을 거스르는 이들에게 대체 왜 그렇게 쓸데없는 고통을 당하고 살아가느냐고 하면서, 자신처럼 근심·걱정 없이 활기차게 살아가라고 권하기까지 한다.
이처럼 그들에게는 코앞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일 외에는 눈에 뵈는 것이 없다. 자기 욕망에 매몰되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을 상실한 그들은, 자기 행동이 가져올 최종 결과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마치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세상의 소망 없음을 볼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이 있다. 그들은 경제적인 궁핍이나 육신의 질병과 고통이 찾아와도,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굽(세상)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심지어 생명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끝까지 하나님의 돌보심만 의뢰한다. 죽음의 자리에서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영화로우심을 증거하면서, 사람은 장차 임할 영원한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에 비하면,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과 어려움은 지극히 짧고 가볍다고 하면서 그 모든 어려움을 ‘묵묵히’ 감내하고 이겨낸다. 그들은 그렇게 슬플 때나 좋을 때나 항상 하나님과 동행한 뒤에, 그들이 그토록 사모했던 그 영원한 본향(本鄕)에 들려 올라가게 된다.
성경은 이런 일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먼저 이것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 때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신들의 정욕대로 행하고 조롱하며, 말하기를 “그가 재림한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후로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이렇게 그대로 있다.” 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옛적부터 있었고 땅은 물에서 나와 물로 형성된 것과 그때 세상은 물이 넘쳐서 물로 망하였다는 것을 일부러 잊으려 한다(벧후 3:3~6).
만일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들은 이제 더 나은 곳을 사모하고 있으니, 그곳은 하늘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 믿음으로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였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값진 것으로 여겼으니, 이는 그가 상 주심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그가 왕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집트를 떠났으니,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처럼 여기고 인내하였기 때문이다(히 11:15, 16, 24~2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이고,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이니, 우리가 그분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롬 8:17, 18).」
당신의 소속은 어디인가? 이 세상인가, 아니면 영원한 하늘나라인가? 이 세상과 하늘나라를 동시에 유업으로 받을 수는 없다(마 6:24).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마음을 진지하고 세심하게 점검해야 한다. 세상 욕심을 끝까지 버리지 못한 부자 청년처럼 되지 말고,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기꺼이 내어놓은 삭개오처럼 되어야 한다(막 10:17~22; 눅 19:2~10).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한 사람들에게 속지 않으심을 명심해야 한다.
각주
1 존 번연,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 유성덕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포켓판, p.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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